

담장은 내것과 타자의 것 경계 척도
허물어 가면 더 많은 행복 가져다 줘
몸 담고 있는 우리 대학 인근에 수원의 광교산이 있다. 그것도 연구실에서 5분 남짓 거리에 광교산이. 광교산은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수원 화성을 지날 때 광악산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광악산을 광교산(光敎山)으로 칭한 것으로 전해진다. 빛의 신성함이 광교산에 서려 있다는 의미로 천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광교산은 성스러운 것으로 통속적인 삶을 가르친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광교산은 시가지를 품고 있는 수원의 주산이다. 서쪽으로 화성의 서해안이, 북쪽으로 서울의 관악산이 보이며 동쪽으로 용인과 남쪽으로 동탄과 오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한 가운데 작을대로 작아져서 보이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보기도 한다. 그것은 티끌과 같은 욕망 속에서 복잡한 세계에 얽히고설켜 살고 있다는 생각과 마주하는 것. 그러한 사색의 끝에 세속적인 욕망의 경계가 사라진 공간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 눈이 시원해졌다 /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 /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 /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이 시편은 공광규 시인(1960~)의 '담장을 허물다' 부분이다. 고향에 돌아온 시인은 담장을 허물고 나서야 비로소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된다는 욕망에 대한 역설을 담고 있다. 담장은 '내 것'과 '타자의 것'을 경계하는 세속의 척도다. 그렇지만 하나의 담장을 허물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것들은 역설적이게도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담장 없는 집'이야말로 담장으로 둘러싸인 현대인의 욕망을 질책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내 것과 타자의 것이 구분이 없어지며 소유에 대한 개념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담을 무너뜨리는 자연과의 소통은
삐걱거리는 마음의 문 스스로 열어
현대인에겐 더 넓은 세계 성찰 기회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기존의 존재적 관점을 배반하며 드러난다. '담을 무너뜨린' 자연과의 소통은 '삐걱거리는' 마음의 문을 먼저 스스로 열면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욕망으로 질주하는 현대인의 자기애를 넘어서 더 넓은 세계를 성찰하게 해 준다. 내 담장 안에 가져올 수 있는 물질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욕망이라는 것. 그렇지만 그 물질을 서로 바라보며 나누는 것이야말로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누구나의 것이 된다. 이를테면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은 소유를 넘어선 소유이며 소유 없는 진정한 소유다. 이를테면 '공시가격 900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생긴 변화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나 '큰 고을의 영주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매번 알면서도 자신 삶의 영주이길 포기하고, 물질의 노예로 전략하는 경우가 많다.
일년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이 지난 봄날 광교산에 오른다. 광교산의 가르침대로 세속의 담장을 허물고 마음의 영주가 되길 소원하는 발걸음은 이미 나의 소유가 아니다. 새싹 같은 깨달음이 여기저기서 파릇하게 움트면서 산행에 빠져들게 한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