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은 1층인데, 나무 데크만 놓인 야외 발코니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우려 때문에 여태껏 무용지물인 공간이었다. 그러다 발코니를 가릴 수 있는 천을 사서 둘렀더니 나비효과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노지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에 대한 욕심이 생겨난 것이다.
쇠뿔은 항상 단김에 빼는 우리 부부는 곧바로 꽃시장으로 달려갔다. 기다란 화분 세 개를 비롯해 흙과 데이지 모종, 튤립 구근 여섯 개, 약간의 야생화 한 아름을 안고 돌아왔다. 이런 욕망은 자꾸 번성하기 마련인지라 어디선가 접이식 테이블도 생기고, 의자도 놓고, 햇빛을 가릴 수 있는 2m짜리 차양도 쳐놓았더니 야외카페가 부럽지 않은 나만의 작업실이 탄생했다.
발코니 꾸미니 카페 못잖은 작업실
변명인지 다짐인지 모를 글 쓰다보니
어느덧 노트의 마지막 장 펼쳐졌다
이상고온으로 30도에 육박하는 사월의 어느 날, 나는 이 일인용 카페에 앉아있었다. 커피를 정성껏 내리고 멜빌의 '모비딕'을 읽는 것으로 나 혼자만의 오픈식을 경건하게 가졌다. 두 시간이 넘어가자 머리 위에 목욕탕 마크가 모락모락 떠오를 만큼 더웠지만 그래도 굳세게 앉아있었다. 나한테 뭔가가 '내세워지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생각도, 감정도, 상상도 아니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빛으로 달아오른 공기 속에 놓여 있을 때 일정한 상태로 예열되는 '감각'에 가까웠다.
뜨거운 햇빛 속에 앉아있으면 나는 항상 여행지의 해변이 떠오른다. 첫 배낭여행지가 터키와 이집트였고 8월과 9월에 더운 지역을 걸어 다닌 탓인지 이후로도 반복될 감각이 뼛속에 각인된 것이다. 첫 책 원고를 넘기고 떠난 태국과 캄보디아, 작가 레지던스로 나간 쿠바, 가족과 한 달 이상 머물렀던 오키나와 등 유난히 더운 나라에 발자국을 찍고 다녔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쨍한 더위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나 이런 감각 기억나는데…'라는 과거 회상은 '떠날 때가 됐나?'하는 미래 계획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노트 사러 가야하잖아' 읊어댄 말엔
뿌듯함과 행선지 생긴 기쁨에 호들갑
태양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지치게 만든다. 마감이 걸려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작업을 하기에는 덥고 추운 것이, 다시 말해 육체를 인식하게 만드는 환경이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그런데 환영하지 않는 것은 내 안의 '문명'에 해당하고, 내게서 '문명'이란 요소를 뺀 나머지 신체의 입장에서는 다른 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육체라는 '수트' 안에 들어있는 정신의 입장에서는 수트를 신경 쓰지 않고 순수하게 정신적 활동만을 원하지만, '나'라는 전체의 차원에서는 이 수트에 닿는 감각이 정신 활동보다 다채롭고 신선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적느라 하려던 작업은 뒷전으로 밀렸다. 뒷전으로 미루면서도 '나는 언제나 일보다 유희가 우선이다. 문장에 관한한 더욱 그렇다. 유희야말로 '꽃눈 틔우기'에 해당하는 것이니 일을 줄이고 유희를 늘리자. 문장에 즐거움의 감각을 새겨 넣자' 뭐 이런 변명인지 다짐인지 모를 글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러다보니 노트의 마지막 장이 펼쳐졌고 말할 수 없이 즐거운 성가심이 밀려들었다. '노트 사러 가야 하잖아!' 속으로 읊어댄 이 말에는 한 권의 노트를 다 쓴 뿌듯함, 공연한 행선지가 생겨난 기쁨이 호들갑스럽게 나타나 있다. 이 또한 햇빛이 불러일으킨 감각 덕분이다. 기분 좋게 투덜거리며, 한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