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사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위기의 시대이며 거대한 전환의 시점에 놓여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18세기 이래 유럽 사회가 만들어놓은 현대 세계의 체제는 그 유효성이 다했다.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관점에서 엄청난 풍요를 가능하게 했고, 지식적으로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과를 초래한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였으며, 과학·기술주의적 지식체계였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그 한계와 역기능을 남김없이 겪고 있다. 기후위기가 그러하고, 정치사회 경제적 파탄이 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찰적 지식과 초월적 특성에 대한 지각을 망각하게 만드는 지식 체계가 우리를 의미상실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다. 한때 우리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리란 착각을 안겨준 체제가 이제는 전환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다.
사람답게 살기위해 많은 것들 포기
지금은 경제적 풍요 가장 위협받아
18세기에 이르러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제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빈곤과 비참함을 직시한 칼 맑스는 그 정치경제 체제를 자본주의란 이름으로 규정했다. 그 허상을 종교라는 이름의 이념이 인민을 거짓 위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무의미의 질곡 안에서 경제라는 거짓 위안을 찾고 있다. 지금의 풍요가 지속되어야 하며, 경제적 퇴보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래서 한 줌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나 인간다움을 위한 최소한의 절제와 규범을 포기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우리네 삶과 공동체를 이처럼 암울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현대 세계의 이 세 가지 체제가 만들어 놓은 현란함에 현혹되어 우리 삶이 어디로 가야하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성찰할 시간을 내팽개쳤다. 이런 자기성찰의 시간은 자본과 과학·기술이 주는 안락함에 비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답게 존재하고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이 그런 규범과 성찰적 행위가 아닌가. 사람 되기가 어찌 쉬울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괴롭지만 생각해야할 시간이 필요하고, 불편하지만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겨우 이룩한 한 줌의 풍요를 지키기 위해 온갖 인간다움의 덕목을 포기했다. 그런데 그 결과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경제적 풍요가 가장 위협받게 되었다. 고리타분한 도덕 정도로 치부했던 그런 덕목을 포기한 대가가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 엄청난 위기라니….
해체위기 공동체 삶 되찾기 위해선
필요한 절제와 성찰의 시간 가져야
죽을만큼 뛰지 않으면 결국 파멸만
그 위기는 불과 석 달 사이에 맞이한 검찰공화국이며, 공정과 법치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권력과 이익의 사유화 현상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위기가 그 뒤에 똬리를 틀고 있다. 기후위기와 공동체 해체의 위협은 물론, 정신적 공허함이 괴물 같은 심연으로 우리를 삼키려 한다. 성취를 이루기는 어렵지만, 그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성찰의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 무의미와 공허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라는 아편에 현혹된 삶을 바꾸어야 한다. 풍요의 환상에 사로잡힌 마음을 되돌려야 한다. 다시금 이 공동체와 이 삶을 위해 필요한 절제와 성찰의 시간, 괴롭지만 그럼에도 있어야할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위기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겨우 두 달 사이에 깨진 착각이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갈수록 깊어지는 온갖 위기 현상을 목격하면서도 돌아서지 않으면 결국 파멸만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면 사람다움을 향해 죽을 만큼 뛰어가야 한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