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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前 국회 부대변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19일 기흥캠퍼스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단지 기공식에 참석해 본격적인 경영행보를 알렸다.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된 뒤 첫 공식 일정이다. 이 부회장은 그동안 5년 취업제한 규정 때문에 운신 폭이 좁았다. '경영 족쇄'가 풀린 이 부회장은 이날 밝은 표정으로 직원들과 소탈하게 어울렸다. 사진 촬영 요청에 응대하고, 구내식당에서는 배식 판을 들고 줄을 섰다. 그가 선택한 '우삼겹 숙주라면'은 가장 빨리 동났다는 후문도 있다.

삼성전자 직원들은 세계 초일류 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오너 일가와 경영진 리스크 때문에 빛바랜 경우도 적지 않다. 삼성 X파일과 뇌물 전달 혐의로 이 부회장이 구속되면서 일류 기업 이미지는 크게 훼손됐다. 이 부회장은 "새로운 기회를 얻게 돼 감사하다. 기업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믿으면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확인한 사면 결정이라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이건희, 생전 사회적 책임·환원 장려
5대 160년 그룹승계 스웨덴 발렌베리
물의 없어 국민들에 존경·사랑 받아


지난 주말 이건희 컬렉션에 다녀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어느 수집가의 초대'전에는 코로나19 재확산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몰렸다. 우리 국민들의 관심이 이렇게 뜨거웠던가 싶을 만큼 가족단위 관람객이 주를 이뤘다. 장르와 시대를 뛰어넘은 이건희 컬렉션은 방대했다. 소장품은 청동기 시대 방울부터 조선시대 문인화, 근현대 회화 그리고 백남준 아트까지 미술사를 관통했다.

이건희 컬렉션은 기부 문화의 전형이다. 우리 재벌 대기업은 압축 성장과 정책 특혜를 바탕으로 성장했지만 사회적 책임은커녕 오너 일가의 도덕적 문제로 입줄에 오르기 일쑤였다. 이건희 컬렉션은 기부문화를 앞서 실천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또한 이 회장 안목을 엿볼 수 있다. 이중섭(1916~1956)은 손바닥 크기 엽서와 담배 속지에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담아냈다. 이 회장은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은 엽서 그림과 은지화에 주목해 무려 104점을 수집했다. 덕분에 우리는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화가 이중섭을 만나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을 이 부회장 석방과 사면을 위한 밑자락으로 보는 부정적 시각도 없지 않다. 이건희 컬렉션을 다녀오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평생 모은 미술작품을 내놓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개인 수장고를 벗어난 기증 결정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소장품 대부분 국보와 보물, 또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다. 적어도 기증 결정만큼은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 부회장 사면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건 재벌 총수에만 집중되는 온정과 특혜 때문이다. 하지만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구분해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 회장은 생전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환원을 장려했다. 그는 2003년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전무와 경영진을 대동해 스웨덴 발렌베리 재단을 다녀왔다. 발렌베리 그룹은 우리 재벌 대기업이 구설에 오를 때마다 벤치마킹 대상으로 거론된다. 발렌베리는 스웨덴 GDP 3분의1, 상장사 시가총액 40%를 차지하는 유럽 최대 재벌 기업이다. 어쩌면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훨씬 크다. 그런데도 발렌베리 그룹은 스웨덴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발렌베리 가문 후손들은 5대, 160년째 가업을 승계하고 있지만 사회적 물의로 입줄에 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는 경영 이념에 따라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재단을 통해서만 간접 참여한다. 또 전체 이익의 85% 상당을 환원하고 있다. 스톡홀름 시청사 앞 크누트 발렌베리 동상은 스웨덴 국민들이 발렌베리 가문과 기업을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서울 시청 앞에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 동상을 세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부럽다.

이 부회장 사면 공감 향후 행보 달려
세상에 없는 사회적 책임 실현 기대


이 부회장 사면이 개인적 특혜를 넘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느냐는 향후 행보에 달렸다. 사회적 책임 실현과 건강한 지배구조에 답이 있다.

이날 이 부회장이 기흥캠퍼스 기공식에서 직원들에게 받은 웨이퍼 기념패 문구는 '세상에 없는 기술로 미래를 만든다'였다. 한 가지 더하자면 '세상에 없는 사회적 책임으로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삼성'을 기대한다.

/임병식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前 국회 부대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