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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대표
해마다 3월이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선운사 뒷자락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동백꽃을 놓칠까 안달이 나서 그런다. 꽃망울을 틔운 동백꽃처럼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 펴보고 싶은 것이다. 어느새 2월은 가고 3월이 왔다. 성질 고약한 동백은 느닷없이 왔다가 난데없이 망울 째 뚝 떨어져 버린다. 야속하다. 그래서 애가 탄다.

선운사 동백꽃을 그리워하는 건 송창식의 '선운사' 노랫말이나 서정주의 시 '선운사 동구' 때문만이 아니다. 이름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과 사물에는 이름이 있고, 이름을 알면 기다려진다. 동백꽃의 학명은 카멜리아(camellia)다. 이 꽃의 이름을 고민하던 식물학자 린네는, 문득 동양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카멜의 이름을 떠올려 동백꽃의 이름으로 정했다(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가 운영하는 카페 이름이 카멜리아였던 이유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리움을 갖는 것이다. 이름 모를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이름을 알면 기다려진다.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매화가 언제 피는지, 복수초와 민들레, 산철쭉이 언제 피어나는지를 아는 사람이 그 꽃을 찾아 나들이에 나선다. 자목련과 동백, 쑥부쟁이가 반가운 것도 이름을 알기 때문이다.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마,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너무 명징해서 눈물


봄이면 산에, 들에 꽃이 만발한다. 진달래나 벚꽃, 철쭉, 개나리, 민들레, 유채, 수수꽃다리, 붓꽃, 산수유 등이 봄에 피는 꽃들이다. 그중 내가 이름과 실제 모습을 구분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달맞이꽃과 괭이눈의 차이, 산수유와 생강나무를 구분할 줄 모른다.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틔우는 건 생강나무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은 고창 선운사의 붉은 동백이 아니라 누런 생강나무를 지칭한다. 피를 엉기게 하는 효과를 가졌기에 엉겅퀴다. 밤에만 피는 꽃이어서 달맞이꽃이다. 흡사하게 생긴 괭이밥은 고양이(괭이)가 좋아하는 먹이라고 해서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왜 달맞이꽃은 키가 크고, 괭이밥은 키가 작은지도 알고 보면 보인다.

소설가 박범신은 소설 '은교'에서 하필이면 쇠별꽃을 언급했을까. 쌀알만큼 작은 흰 꽃에 온통 초록 줄기뿐인 쇠별꽃은 보는 순간 그 앙증맞음과 싱그러움에 반할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은교의 이미지가 꼭 그렇다. 모름지기 작가는 꽃의 이름과 꽃말 정도는 알아야 한다. 조두진은 소설 '능소화'에서 능소화가 왜 기생꽃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는지, 정유정은 '7년의 밤'에서 왜 하필 가시박이라는 꽃을 등장시키고 있는지, 꽃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이나 소설의 주제까지 이해하게 된다(김민철, '문학 속에 핀 꽃들'에서).

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어떤 시인이 '저기 저 들판에 핀 이름 없는 들꽃들'이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읽기를 중단한 편집자는 망설임 없이 원고 뭉치를 집어던졌다. 고 김정한 선생께서 후배 문인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특히 시인이라면 들꽃의 이름 정도는 알아내려고 노력했어야 한다. 우리 산하에 이름 없는 들꽃은 없다.

꽃·나무·사람 이름 알게되는 건
설레는 일… 3월이다, 세상 시름은
던져버리고 선운사 동백꽃 보러가자


그깟 꽃 이름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네 삶에서 그리워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우린 이미 많은 이름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그것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며 산다. 성철 스님이 그리운 건 대단한 진리를 일깨웠기 때문이 아니다.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너무 맑고 명징해서 나는 눈물이 난다.

꽃의 이름, 나무의 이름, 구름의 이름,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는 건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 신산한 설렘으로 우리는 다시금 살아갈 이유를 알게 된다. 3월이다. 세상 시름일랑 던져버리고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가자. 혹여 늦어 꽃이 졌거든 막걸릿집 주인장 육자배기 가락에 남은 것이라도 듣고 오자.

/최준영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