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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대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T.S.엘리엇의 장시 '황무지' 첫 구절)이라 했던가. 내게도 4월은 아픈 달이다. 제주 4·3이나 세월호 참사의 상흔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겪은 고통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해 4월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훌쩍 세상을 떠났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함께 더 나은 미래를 꿈꾸던 친구이고, 후배였다.

캠퍼스의 4월은 따스한 봄기운과 청춘의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싱그러운 달이다. 그 시절 그와 나는 자주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온종일 사물놀이패의 사물 소리가 요동치던 그날도 함께 술을 마셨고, 거나하게 취한 그는 가방을 메고 홀연히 캠퍼스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는 회기역에서 휘경역까지 죽음의 선로를 걸어갔다. 정작 괴로웠던 건 그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그가 왜 스스로 죽음의 선로를 걸어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는다. 시인 진은영이 말했던가. 트라우마는 그 일을 겪기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상처라고. 세월호 유가족이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아무 말없이 훌쩍 세상 떠난
사랑했던 친구이자 후배
안 잊으려 발버둥 칠수록 더 틈입


스물다섯의 유미코는 첫사랑이었던 남편의 자살에 충격을 받는다. 더 큰 충격은 자신이 그 죽음의 원인을 유추할 아무런 단서를 갖지 못했다는 자책감 혹은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다. 이후 상실과 불안, 가난을 끌어안고 견뎌야 했던, 유미코는 불현듯 혼잣말을 시작한다. 떠났으나 떠나보낼 수 없는 남편을 붙잡고, 남았으나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는 힘없는 목소리로 묻는 것이다. "당신은 왜 기차가 달려오는 선로 위를 걷고 있었나요.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요."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집 '환상의 빛'을 읽었다. 어느새 우리에게도 친숙해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장편극영화 데뷔작의 원작 소설이다. 읽는 내내 흉통에 시달렸다. 반짝이는 은판처럼 반짝이는 바다, 파도와 파도 사이에서 슬며시 속살을 드러내는 햇빛, 암울한 해명과 황량한 어촌의 흩날리는 눈바람. 절제된 대사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유미코의 불안한 자아와 떨리는 목소리가 여지없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사랑의 상처는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해야 하는 걸까. 표제작 '환상의 빛' 뒤에 수록된 '밤 벚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은 결국 새로운 사랑에 눈을 뜨는 것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일깨운다. 소설의 말미를 장식하는 아야코의 회한과 환희는 사뭇 절절하다.

"아야코는 그렇게 언제까지고 밤 벚꽃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치고, 그 안에서 문득 보이는 것이 있었다. 아아, 이거구나, 하고 아야코는 생각해보았다(…) 지금이라면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는 방법을, 오늘이 마지막인 꽃 안에서 일순 본 것인데, 그 아련한 기색은 밤 벚꽃에서 눈을 떼면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나에겐 아픈 계절이지만
그 덕분에 앞으로 나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맛볼 뿐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그와 함께 죽는다(베로나 카스트, '애도'에서). 그해 4월 친구는 소리 없이 내 곁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껏 내 마음속에 들어앉아 나의 삶과 동행한다. 그의 동행이 때론 부담스럽고 때론 괴롭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덕분에 나의 일부는 죽었고, 그 덕분에 나의 일부는 역동한다.

몽테뉴는 친구, 라 보에시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판사직을 그만두고 자신을 성에 가둔 채 '에세' 집필에 몰두했다. 나는 친구의 죽음 이후 막연하게 동경하던 작가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삶 속에서 함께 산다. 그의 죽음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그는 더 가까이, 더 깊이 내 삶으로 틈입한다. 내게 4월은 아픈 계절이지만 그 아픔 덕분에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최준영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