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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대표
5년 전 대전의 노숙인 시설에서 강의 제안을 받았다. 알고 보니 애초 다른 사람에게 먼저 제안했던 것이었다. 그게 돌고 돌아 내게로 왔다. 턱없이 적은 강사비, 대상이 노숙인이라는 말에 손사래를 쳤던 모양이다. 나까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첫 강의 때 그를 만났다. 쉬는 시간에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뒤따라 나오더니 스스럼없이 내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무는 것이었다. 경석이(가명)였다. 명색이 선생인데, 서슴없이 담배를 무는 게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걸어오는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강의 중 하신 말씀 중에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철학자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눌한 듯하면서도 은연 힘이 실린 말이었다. "책 좀 추천해주세요. 저도 공부하고 싶어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쯤 말을 섞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은 얼마든지 추천할 수 있지요. 근데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 건가요?" 잠시 머뭇대던 경석이가 말을 받았다. "저도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어서요. 제 꿈은 사회복지사예요. 저분들(강의실 쪽을 가리키며)에게 필요한 게 뭔지 누구보다 잘 알거든요." 말을 끝내는가 싶더니 대뜸 전화번호를 물어왔다. 그렇게 경석이와 전화번호를 교환하게 되었다. 

 

몇 개월 뒤 경석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의 씩씩한 목소리였다. "다음달에 선생님 내려오신다는 얘기 들었어요. 오시면 제가 모시고 싶어요." 모신다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딱히 마다할 것까진 없지 싶었다. 그렇게 경석이와 만남이 시작됐다. 대전에 내려갈 때마다 우리는, 선생과 제자로, 혹은 친구처럼 친밀하게 교류했다.

5년전 시설 강의서 만난 경석이
사회복지사 꿈 위해 돈벌고 공부
8월엔 조기졸업 공무원 시험 계획


1년여 가 지난 뒤에서야 경석이가 거리의 삶을 살게 된 사연을 알게 되었다. 이혼한 부모 양쪽으로부터 버림받은 뒤 10대 때부터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엔 알코올중독자가 돼버렸고, 거리에 쓰러져 잠들기가 다반사였다. 노숙인 시설과 거리를 전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어느덧 20대 후반의 나이가 됐다.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사람이 대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별생각 없이 강의에 참석했다. 강의를 듣던 중 불현듯 인생의 답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경석이는 꿈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사이버대학 입학을 목표로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1년 만에 대학 등록금을 마련했다. 대학 입학 후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근황을 물으니, 올 8월에 조기졸업을 하게 되었고, 곧바로 사회복지직 공무원 시험을 볼 계획이라고 말한다. 예의 밝은 목소리였다. 듣다가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여전히 힘겹게 사는 청년들을 위해서 네 이야기를 신문에 소개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좋아요"라고 답한다.


그만 울컥… 청년노숙자 늘어 심각
쉽지않지만 '제2·제3 경석이' 기대


특강 한번 하기로 했던 것이 어느새 5년째에 접어들었다. 매달 대전 노숙인 시설 강의를 위해 대전으로 내려간다. 요즘은 직접 강의하는 대신 다른 강사를 소개한다. 딱히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늘 강사와 동행한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거기, 대전에 내 친구 경석이가 있다. 매달 대전에 내려가는 이유다. 


난생처음 노숙인 강의를 경험한 강사에게 소감을 묻곤 한다. 20대, 젊은 노숙인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는 대답이 주를 이룬다. 5년 전, 경석이를 만났을 때의 내 느낌이 꼭 그랬다. 코로나 이후 젊은 노숙인이 점점 느는 추세다. 10여 명의 수강생 가운데 20·30대가 반을 차지한다. 청년 문제의 심각성이 엉뚱한 곳에서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적이 당혹스럽다.

제2, 제3의 경석이를 기대해 본다.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군가 지속적인 관심과 믿음으로 관계 맺기를 시도해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다. 내 친구 경석이의 대학 조기졸업을 미리 축하한다. 공무원 시험합격도 기원해 본다. 무엇보다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경석이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최준영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