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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경희궁 궁담길 따라 걷는 길에 비가 온다. 비는 멈출 기세 없이 쏟아진다. 여름을 알리는 입하 비일까? 새벽부터 내린 비에 궁 안은 책 속 풍경처럼 고요하다. 아니 아무도 없는 경희궁은 쓸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산을 접고 행각 따라 걷는 길에 우연히 왕과 왕비의 모습을 되새겨 본다. 왕은 살아 궁에, 죽어 능에, 영혼은 종묘에 머문다. 왕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경희궁에서 나고, 경희궁에서 죽은 왕에게 묻는다. 숭정전 지나 침전이 있는 궁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궁 안 임금의 침전인 융복전과 왕비의 침전인 회상전이 보이질 않는다. 꽃 계단 화계에 함박꽃 작약만이 꽃을 피울 태세다.

비가 잠시 멈추는 시간, 상서러운 바위 서암에서 물이 거세게 내려온다. 서암은 왕기가 서려 있는 바위라 광해군 이후 임금들이 이곳에서 기원하였다. 태령전에 영조의 어진이 어른 키만큼 걸려있다. 숙종의 아들이자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숙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360여 년 전 현종의 적장자 외아들로 13세에 즉위해 60세까지 왕비 3명과 함께 살았던 조선 19대 왕이다. 또한 희빈 장씨와 숙빈 최씨 사이에 아들 2명을 낳아 왕으로 만든 강한 인물이다. 위태로운 정치적 국면마다 지혜롭게 전환한 '환국의 시대' 위기의 리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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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가 잠든 명릉(明陵).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3세에 즉위한 조선 19대 왕

위태로운 정치적 국면마다
지혜롭게 전환 '환국의 시대' 리더


숙종은 인왕산 기슭 경희궁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만들었던 경희궁 회상전에서 태어나고, 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했다. '상서로움이 모인다'는 회상전과 '복이 융성한다'는 융복전이 숙종의 생과 사를 본 전각이다. 숙종은 서궐인 경희궁에서 자라 이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숙종은 3명의 왕비와 1명의 빈과 함께 서오릉에 잠들어 있다. 숙종의 능이 명릉(明陵)이다. 능은 이름처럼 하늘 아래 산이 감싼 명당이다.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는 쌍릉으로, 인원왕후 김씨는 단릉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20세에 천연두로 숨을 거둔 정비 인경왕후 김씨는 죽어서도 혼자 익릉(翼陵)을 지키고 있다. 그 넓은 공간에 홀로 외롭게 누워있다. 또 익릉 옆에 후궁에서 왕비까지 된 후 폐위되어 사사된 희빈 장씨의 무덤인 대빈묘도 숙종 곁에 있다. 1969년 광주에서 이장하였다. 아이러니한 모습이 서오릉에 숨어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과 순회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후궁 영빈 이씨 묘인 원 그리고 경종의 생모인 대빈묘까지 '능·원·묘'가 나란히 있다. 왕릉에서 보이는 기이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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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과 원 그리고 묘가 어우러진 숲속 정원같은 서오릉.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능은 왜 경기에 많이 있을까? 조선 왕릉은 42기가 있다. 능법에 따라 한양도성 성저십리를 벗어나 능이 만들어졌다. 한강 건너 선·정릉과 헌·인릉도 경기 광주였다. 한양도성 동쪽에 건원릉을 시작으로 남양주에 동구릉과 광릉, 여주에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고양에 서오릉과 서삼릉, 파주 삼릉과 장릉 그리고 김포 장릉이 모두 경기에 있다. 수원에 융·건릉과 개성에 있는 제릉 및 후릉도 사실 경기다. 저 멀리 영월 장릉까지 대한민국에 있는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계곡 물소리·새소리 가득한 정원
아끼던 고양이 '금손'도 함께 잠들어


왕은 살아 도성 안 궁에, 죽어 도성 밖 능에 궁궐처럼 영원한 안식을 하고 있다. 능에는 무덤 옆 재실과 정자각이 있고, 홍살문 지나 향로와 어로를 따라 가면 비문까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더욱이 능 주변은 조경이 잘 되어 풍수지리로 보면 배산임수 남향에 해가 항상 머무는 자리로 숲이 우거져 있다. 모든 왕릉은 수목원처럼 소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전통 꽃들이 만발한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봄에 가면 생육이 시작되고, 여름이면 숲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단풍에 물들고, 겨울이면 눈 속에 덮인 절경이 바로 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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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없는 박물관에 핀 서오릉 숲속 꽃밭.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비 내린 후 서오릉은 계곡 물소리와 새 소리에 둘러싸인 커다란 정원이다. 빗물에 연두색 잎은 초록색으로 바뀌고 있다. 비 그친 사이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다. 서오릉 숙종 묘역에 평소 아끼던 고양이 '금손(金孫)'도 왕과 함께 잠들어 있다. 도성 안 궁이 멀다면 도성 밖 능으로 걸으면 어떨까. 가정의 달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서오릉 옛길을 시나브로 걸어보자.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