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연결·공생의 돌봄… 인생의 마지막에서 존중받을 권리
신체 억압 → 폭력적 반응 → 약물투여 ‘악순환’
편견 탈피 돌보는 방향 따라 퇴행속도 달라져
인천시립치매요양병원, ‘독립된 존재’로 인식
휴머니튜드 ‘서기·접촉하기’ 등 4개 기법 도입
기억을 잃고 무너져 내려 고립된 치매 환자가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천 서구에 있는 제1시립노인치매요양병원에서 중증 치매 환자 서경옥(77)씨를 만나면서 ‘편견’을 거둬낼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서울 한 요양시설에서 이곳으로 옮긴 서씨는 스스로 서 있거나 걷지 못해 아들에게 업혀왔다. “움직이면 다친다”는 주변의 걱정에 서씨는 옴짝달싹 못하면서 몸이 굳어갔다. 시립노인치매요양병원은 서씨와 ‘스스로 서기’ 운동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축을 받아 일어섰습니다. 벽을 짚어 화장실에 가고, 병동을 걷고, 지금은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의학적 기준으로 퇴행성 질환을 다시 본래대로 되돌리기 힘들다. 다만 돌봄의 방향에 따라 퇴행 속도는 달라진다. “몸도 불편한데 혼자 다니시면 다친다”는 걱정이 서씨를 하루종일 누워 있게 했다면, 스스로 일어서도록 지지하는 주변의 노력은 그에게 일상을 돌려줬다.
인천 시립노인치매요양병원은 다른 시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활력’으로 채워져 있다. 치매 환자 130여 명은 병동 휴게실에서 인지 능력 향상에 필요한 놀이를 즐기거나 다른 환자들과 담소를 나누며 공간 곳곳을 자유롭게 활보한다. 한 환자는 놀이실에서 고무공을 손 위에 올려두고 앞뒤로 굴리며 재활 치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형 탁자에 모여 앉아 색연필로 색칠 공부를 하거나 식물·동물 도감을 보는 환자들도 눈에 띄었다. 환자들은 침대에 누워 있는 대신 서서 움직이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 선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 구속에서 해방되고 이동의 자유를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환자가 화장실을 가야 할 때 요양보호사가 바지를 벗기고 배변 활동을 지켜보는 상황에 마주하거나, 침대에서 기저귀를 교체해 주길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별이 다른 간병인 앞에서 맨몸을 드러낸 채 목욕실로 옮겨지지 않아도 된다. 독립된 존재로서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활동을 환자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천시는 2020년 국내 처음으로 노인치매요양병원을 포함해 공공 의료시설에 환자의 인간다움과 존엄성을 보장하는 ‘휴머니튜드’(Humanitude·인간과 태도의 합성어)를 도입했다. 휴머니튜드는 ‘서기’를 비롯해 ‘바라보기’ ‘말하기’ ‘접촉하기’ 등 네 가지 방식을 환자에게 적용하는 돌봄 기법이다. 인력이 부족한 돌봄 현장에서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 원칙을, 인천의 공공 의료 담당자들이 힘들여 지켜내고 있다.

휴머니튜드를 도입한 이후 이 병원 간병인들은 병실 문을 열기 앞서 인기척을 낸다. 환자 눈높이에 맞춰 자세를 낮춘다. 환자 어깨에 손을 얹고 안정감을 주는 데 집중한다. 환자 치료를 앞세워 ‘침략’에 가까웠던 돌봄 방식이 환자를 알아가기 위한 ‘접근’으로 변화하게 됐다.
인천시가 휴머니튜드를 적용한 뒤 치매 환자들의 불안·초조·망상 등 신경행동 증상이나 공격성이 줄고 감정 표현이 늘어났다. 환자가 의료진을 신뢰하기 시작하면서 간병인뿐 아니라 의료진 만족도 역시 한층 더 커졌다.
휴머니튜드 돌봄 기법을 개발한 로젯 마레스코티(Rosette Marescotti·70) 프랑스 국제 지네스트-마레스코티(IGM) 연구소 공동 창립자는 “치매 환자는 낯설거나 신체를 억압하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껴 폭력적 증상을 보이는데 이 경우 대부분 의료진은 약물 투여를 늘리거나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며 “이 같은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는 환자의 감정을 알고 그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도록 충분한 신뢰 관계를 쌓는 돌봄이 적용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경인일보는 지난 10월부터 11월까지 약 두 달간 치매 환자의 감정과 자유를 존중하는 돌봄 사례를 심층 취재했다. 한국(인천)과 프랑스·일본 등 국내외 치매 환자·가족·의료진 50여 명을 만나 ‘치매 환자가 원하는 돌봄은 무엇인지’ ‘치매 환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돌봄은 환자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치매 환자와 공생을 위해 사회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취재했다.
일본 후쿠오카시 치매 프렌들리센터에서 새 일자리를 얻은 타케타니 키요미(Taketani Kiyomi·76), 인천시 공무원 출신으로 치매 극복 희망대사로 활동하는 이기범(65)씨, 프랑스 요양시설 시테 베르테(Residence de la Cite Verte)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카르다로폴리 마르셀(Cardaropoli Marcelle·90) 등 치매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은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10%인 100만명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 당장 내년부터 노인 인구 비율이 전체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만큼, 국가 차원에서 지속가능한 치매 돌봄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해야 할 때다.
경인일보는 치매 환자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휴머니튜드 돌봄을 개발한 프랑스, 공공에서 선제적으로 치매 환자 돌봄 정책을 펼치는 일본, 인천의 선진 사례를 5회에 걸쳐 보도한다.
※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