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양식 (전 경주대 총장)
[경인일보=]우리는 가끔 지난날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한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가지 않은 그 길들은 지금도 지난날처럼 우리에게는 꽃같은 아름다움, 보석같은 신비로움으로 남아 있다. 지난날 가지 않은 그 길이 아직도 이처럼 아름답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지금은 갈 수 없는 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이름 모를 산사의 무서운 사천왕상 앞에 선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앞을 막아선 갈림길 앞에서 길 떠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긴 여정에의 첫발을 망설였다. 그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그 길들은 우리가 가기에는 어찌 그렇게 좁고도 험하게 보였던지…. 그래서 그 길은 지금도 우리에게 가지 않은 길로 남아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때 우리가 가고 있던 길 앞의 어느 골짜기쯤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새로운 길에 대한 강한 우리의 열망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신비로움으로 우리를 이끌던 그 가지 않은 길들의 신선한 유혹도 우리가 가던 길이 주던 달콤한 기대를 이기지는 못했다.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길을 멈추고 우리는 문득 뒤돌아본다. 그리고 우리는 발견한다.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린 까마득히 멀리 있는 길들의 시작의 끝을. 행여나 남들이 앞서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조바심 때문에 허둥지둥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서둘러 달려온 길.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에는 언제나 앞서간 이들의 알 수 없는 고뇌와 땀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 우리가 온 길의 까마득한 시작의 끝으로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의 꼬리가 희미하게 보인다. 지금도 그 길은 지난날 그때처럼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으면서.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꾸고 있는 모든 꿈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나 꾸지 않는 꿈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이루어 진 적이 없다는 말을 함께 기억한다.

수없이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들로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의 길바닥은 윤이나 반들거린다. 길섶에는 앞서간 이들이 흘려놓은 수많은 사연과 회한들이 내려앉아 새로이 오가는 이들에게 웅변처럼 때로는 속삭임으로 전하고 있다. 앞서간 이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반복하고 만 그들의 부끄러운 실수에 대하여, 번번이 발휘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 용기에 대하여, 끝까지 참는데 실패한 인내에 대하여, 도중에 그만 두고만 자비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대하여.

가지 않은 그 길에 대한 포기하지 못하는 동경과 참을 수 없는 열망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가 지난날 가지 않은 그 길을 찾아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을 결코 멈추지 않을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가지 않은 길 앞에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세계와의 멋진 조우 못지 않게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의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날 가지 않았던 그 길을 지금은 누군가가 힘차게 가고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그 누군가가 가지 못한 길을 지금 우리가 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 있는 모든 길을 우리가 다 갈 수는 없으므로. 그래서 길을 가고 있는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함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날 우리가 가지 않은 길도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도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지난날 우리가 가지 않은 길 못지 않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길,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무엇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지난날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지금 더욱 아름다워 질 것이다.

꽃처럼, 보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