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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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20·끝)] 전통·현대가 공존 '수원의 옛 건축물' 지면기사
수원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다. 전통적으로 왕을 상징했던 화성행궁과 함께 고층빌딩이 공존하는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수원은 오랫동안 주요한 지위를 가진 도시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과거의 영광과 함께 일제가 남기고 간 상처, 그 상처를 회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국가 등록문화재이자, 근대문화유산인 '부국원'과 '구 수원문화원', '구 수원시청사'에서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격변의 현대사를 관통한 '부국원'수원시 팔달구 향교로 130. 시대극의 한 장면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 한 채 서 있다. 수원 구 부국원(등록문화재 제698호)이다.제국주의 일본은 수탈을 위한 증산 정책을 위해 품종 개량과 일본식 농법을 이식했다. 그 선상에서 일본인 이하라 고로베 등 8명은 1914년 농작물 종자·종묘·농기구·비료를 판매하는 '주식회사 부국원'을 설립하고 1923년(추정) 지금의 위치에 세운 건물이 우리가 '구 부국원'으로 부르는 것이다.근대기 조적조 건축의 모습을 띠고 있는 부국원은 85.95㎡의 3층 건물로, 일제강점 후반에 전면과 양 측면에 타일이 시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3개의 아치형 창호를 설치해 미학적 가치를 높였다. 다만, 정확한 건립연도를 알기 어렵고 100년의 시간을 한 자리에서 지키면서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최초 건립 당시의 모습은 추정만 가능한 상태다. 2층 건물이었으나 중간에 3층으로 개조됐으며, 계단실의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어 복원 전에 사용했던 계단은 철거하고 현재 목재 계단을 설치했다.그도 그럴 것이 부국원은 해방 이후 법원(1952~1956)과 교육지원청(1957~1960), 공화당 경기도당(1974), 수원예총(1979)을 거쳐 한 때는 내과의원(1981~2010), 인쇄사(2010~2015)로 사용되기도 했다. # 백년의 시간 버텨낸 '부국원'농업회사 건물로 건립, 법원·공화당사 등 사용근현대사 상징… 市 매입후 복원·전시관 활용 수원시는 2006년 시향토유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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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9)] 한국전쟁 첫 날의 흔적 '포천 방어벙커' 지면기사
1950년 6월 25일. 한동안 이어지던 가뭄 끝에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적지 않은 비가 내렸지만 이미 늦어버린 모내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포천 주민들이 집을 나서던 참이었다. '쾅'하는 소리가 들리자, 주민들은 직감했다. 전쟁이 시작됐다고. 38도선을 끼고 살았던 포천주민들은 만세교로 모여 피난을 시작했다.같은 시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만세교 인근에 위치한 벙커에도 비상이 걸렸다. 북한군 제3사단과 제105전차사단 예하부대들이 남침을 시작해 만세교 방면으로 진출해왔다.1950년 6월25일 '쾅' 소리에 전쟁 직감포천 주민들, 만세교로 모여 피란 시작 국군 제9연대 대전차특공대는 포천방어벙커에서 북한군 탱크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나섰지만, 갑작스런 전투와 부족한 무기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북한군을 막아섰지만 전차포 사격에 밀려날 수밖에 없다.주소,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45-2. 호국로 43번 국도와 포천천이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한 포천방어벙커는 2013년 등록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 경기도내 근대문화유산 중 하나다. 수 많은 한국전쟁 관련 문화재 중에서도 그 시작을 처음 목격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한국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포천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년, 휴전이 되고도 69년의 시간이 지난 2022년 12월 포천방어벙커는 여전히 전쟁이 한창이던 모습이다. 포천천 주변으로 펼쳐진 겨울 풍경은 쓸쓸한 느낌을 주고 있어 포천방어벙커에 난 크고 작은 포탄 자국이 더욱 아프게 보였다.포천방어벙커는 남하하는 북한군의 기갑부대를 지연시켜 피란민을 보호하고 후반에 있던 국군이 전열을 갖출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1948년 마련됐다. 한국전쟁 이전에 국군은 이같은 목적으로 총 4기의 대전차호 콘크리트 방어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3기는 모두 전쟁 중에 멸실되고 유일하게 남은 것이 포천방어벙커다.포천방어벙커가 지키는 43번 국도는 서울과 강원도, 함경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특히 한국전쟁 이전 남한과 북한을 가르던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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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8)] 한국 미술사의 이정표 된 '4개의 등록문화재' 지면기사
한국 미술사의 특이점(Singularity)을 보여주는 4개의 작품이 있다.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시대인 20세기 초 한국 미술사 역시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는 데, 당시 등장한 청전 이상범(1987~1972)과 춘천 이영일(1904~1984), 수화 김환기(1913~1974), 모후산인 오지호(1905~1982)는 과거와의 결별이 아닌, 미래를 잇는 작품으로 한국 미술의 발전을 견인했다. 이들의 대표작인 초동(이상범)·시골소녀(이영일)·론도(김환기)·남향집(오지호)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현재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있다. 각 작품들은 어떻게 한국 미술의 이정표가 됐을까.■ 한국 근대사의 비극을 온 몸으로 부딪힌 오지호 '남향집'한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남향집'은 1939년 오지호가 개성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기, 송악산 기슭의 교사 관사를 배경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가로 65㎝에 세로 80㎝의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그림은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한 낮의 남향집 앞에는 대추나무가 선명한 그늘을 드리우고, 강아지가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즐기고 있다. 빨간 옷을 집은 작가의 딸은 문 밖을 내다보는 모습이다. 밝은 햇살 아래 나무 그림자는 파란색에 가깝고, 노란색 담장과 초록색 나무, 아이의 빨간 옷 등 원색의 대조가 조화롭게 배치됐다.오지호가 지향하던 인상파 수용 방식과 향토색 구사 방식을 반영하면서도 1930년대 한국 화단의 일반적 특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등록문화재로 선정됐다. 1982년 그가 작고한 후, 유언에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근대사 비극 겪은 오지호 '남향집'부친 경술국치 자결·절친은 광복후 월북개인적 아픔에도 아름다운 풍경 화폭에 오지호는 동경미술학교 유학시절부터 일본 화풍과 차별화한 조선풍의 화면 설계에 주력했던 작가다. 민족 미술의 구현이라는 시대 정신과 함께하면서 구상 화단을 지킨 대표적 화가 중 하나면서, 호남화단의 대부로 호남 구상 회화의 본산이라는 평가가 따른다.화단의 높은 평가와 별개로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5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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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7)] 한국영상자료원 파주보존센터 소장 '등록문화재 영화 8편' 지면기사
가장 대중적 예술 장르를 하나 꼽으라면 당연 '영화'를 들 수 있다. 특히 한국은 세계적으로 비교해봐도 영화를 많이 소비하면서, 또 주목도 높은 작품으로 전 세계 영화팬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한국이 세계 영화계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 곳이라면, 그 특별함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곳이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파주보존센터다. 이 곳에는 등록문화재로 등재된 8편(미몽·자유만세·검사와여선생·마음의고향·피아골·자유부인·시집가는날·청춘의십자로)의 영화를 비롯한 2만5천여편에 달하는 영화 필름이 발굴, 보존되고 있다.파주출판도시에 위치한 파주보존센터는 국내에서 제작되는 영화를 안정적이고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건립된 영화 전문 보존·복원 전문시설로, 필름으로 제작된 영상뿐 아니라, 의무납부제에 따라 국내에서 제작된 모든 영상을 보유하고 있다. 유실된 영화를 제외한 대한민국의 모든 영상 콘텐츠는 이 곳에 모이는 셈이다.한국영상자료원 신동민 보존관리팀 대리는 "보존센터에 있는 작품들은 과거 한국사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면서, 한국 영화가 발전해온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며 "보존된 자료를 연구하면 다양한 가치가 드러난다"고 말했다.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는 등록문화재 영화는 8편이지만, 보존센터 자체가 하나의 보물창고라는 뜻이기도 하다.신 대리는 "다만, 과거에는 영화가 한 번 소비되면 그 가치를 잃는 것처럼 인식되면서 유실된 것이 많다"며 "상영을 마친 필름은 밀짚모자처럼 엮어 쓸 정도였기 때문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작품이 더 많다"고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 '청춘의 십자로'등록문화재 가운데 2편의 영화가 무성영화다. 먼저 1934년 안종화 감독, 이원용 주연의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는 농촌 출신 젊은이들이 서울에 올라와 도시에서 겪는 소비문화, 부적절한 남녀간의 관계, 향락적인 일상 등 삶의 단면을 그리고 있다.2007년 서울 구 단성사 건물이 철거되면서 창고를 비웠는 데, 9롤의 오래된 질산염 필름이 발견됐다. 그 가운데 8롤이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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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6)] 한국 서양화 거장의 안식처 '용인 장욱진 가옥' 지면기사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 규칙 없이 들어선 용인의 어느 주택가. 예고 없이 나타난 한옥 담장이 시선을 끈다. 담장 바깥으로만 시간이 흘렀는지, 삐죽 고개를 내민 소나무와 그 사이로 한옥이 낯설게 보인다. 전통 담장은 이내 붉은 벽돌의 현대식 담장으로 이어지고, 그 끝에는 최근 지은 건물에 어울릴 법한 회색 철재 출입구가 있다.짧은 걸음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이곳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404호)인 용인 마북동 장욱진 가옥이다. 한국 1세대 서양화가 장욱진 화백(1917~1990)이 영면에 들어가기 전 다양한 경향의 공존과 종합을 이룬 공간이기도 하다. 장욱진과 닮은 고택장욱진 화백은 서구식 회화기법을 사용하면서도 한국적인 선과 색을 창조해낸 대한민국의 대표적 서양화가다. 그의 취향이 담긴 장욱진 가옥 역시 동양과 서양이 만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많은 방문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 하나다. 2017년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등 여러 드라마 촬영지로도 주목을 받은데 이어, 최근에는 BTS의 리더 RM이 이 곳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그의 외국인 팬까지 찾아오고 있다.한옥 출입구를 대신해 방문객들을 맞는 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 한옥 관리사다. 장욱진 화백의 가족을 돕고 집안일을 돌보던 관리인들이 묵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카페로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이 역시 등록문화재인 한옥 안채·바깥채와 같은 시기 지어진 곳이지만, 손님을 맞기 위해 리모델링이 진행되면서 등록문화재로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1884년 지어진 경기도 민가 형태 보존'ㄱ'형 안채 'ㄴ'형 바깥채 붙여 'ㅁ'형태로도시화로 남아있는 몇 안되는 근대 민가장 화백이 손수 구상한 양옥도 함께 보존작품 '자동차 있는 풍경'속 이상향 그려관리사를 지나면 'ㄱ자' 모양의 안채와 'ㄴ자' 모양의 바깥채가 나오는 데, 전형적인 경기도 전통가옥의 형태다. 장 화백은 노년에 병이 생기자, 병원이 있는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평생 고집하던 시골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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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5)] 과거와 현재 잇는 '이천 수광리 오름가마' 지면기사
한 장인이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순백의 매끈한 모양새가 보기 좋지만, 장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가차 없이 내던진다. 오래전 TV광고의 한 장면이다. 지금은 뭘 위한 광고였는지 잊었지만, 당시의 광고를 보는 사람들의 반응만은 선명하다. 우리가 잊고 있던 '장인정신'을 그 광고에서 봤다는 것이다. 도자는 한국 장인정신의 상징이다. 비록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도자산업은 위축됐지만, 뜨거운 장인정신을 품은 전통 장작가마는 이천 수광리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12칸의 '수광리 오름 가마'12칸의 수광리 오름가마는 뜨겁게 데워진 열기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언덕을 따라 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다. 길이 27m의 흙으로 만들어져 얼핏 토성같이 보이기도 하는 오름가마. 그 위로 전통 처마가 세워졌고, 옆으로는 장작이 수북이 쌓여있다. 가마에서 시선을 돌리면 현대적인 감각의 카페와 열을 맞춘 도자기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자기 전시관이 있어 수광리 오름가마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1949년 초축 칠기가마, 1962년 개축현재 사용되는 가장 오랜 장작가마故 조소수 선생 인수, 지금 형태로 수광리 오름가마는 1949년 초축된 칠기 가마를 1962년 개축한 12칸의 계단식 연실등요다. 가마 구조는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근대식으로, 내화벽돌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1960년대 이후 이천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신축·개축된 현대식 전통 장작가마 초기 양식으로, 현재까지 사용되는 장작가마 중에는 가장 오래됐다.조선시대까지 전통가마는 점토를 이용해 지붕을 쌓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었지만, 일본 아리타와 미노지역의 가마양식이 도입되면서 벽돌로 계단식 바닥을 깐 뒤 상부를 벽돌로 축조한 가마형태를 띠고 있다. 이전의 전통가마는 점토만을 이용해 오랫동안 사용하기 어려웠고 사용 중에도 천장에서 흙이 떨어지는 등 구조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산업화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개량이 이뤄진 것이다.오름가마를 자세히 보면, 아궁이에서 굴뚝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오른쪽으로는 각 칸마다 출입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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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4)] 성쇠의 복판 꿋꿋하게 자리 지킨 '구 안성군청' 지면기사
붉은 벽돌의 안성1동 주민센터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좌우로 벽돌 기둥 6개씩, 모두 12개의 기둥은 주민센터 공간과 그 바깥을 구분 짓고, 오각형의 정문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며 다른 지역 주민센터와는 현격히 다른 모습으로 주민들을 마주하고 있다. 국가등록문화재인 구 안성군청은 1928년 이 자리에 들어선 이후 현재까지 주민들과 관련된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 건물의 숨은 역사 속에는 번성했던 과거 안성의 모습과 일제의 야욕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왜곡시켜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작·소출 관리하기 위해 건립붉은 벽돌 치장 쌓기·좌우 대칭 외관 '압도'현대식 리모델링 거쳐 현재 주민센터 활용포섭하기 어려운 안성군 배제하고 철도 건설번성했던 모습 사라지고 도시 개발서도 소외교통요충지 얻지 못한 일제 야욕의 피해지역 ■ 구 안성군청일제강점기 안성 일대 평야에서 경작 작업과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1928년 들어섰다. 안성 관아 근처에 있던 안성군청을 이전하기 위해 신축한 건물이라는 배경에서 구 안성군청의 오랜 역사를 느낄 수 있다.1928년 8월 23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안성군청은 10월 준공예정이고 본관 연와조 80평에 부속사 24평, 군수관사 27평 규모로 지어진다는 예고 기사가 실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안성1동 주민센터 건물 외에 없지만, 1990년대까지는 목조 건물이 남아있었다고 전해진다.일제강점기에 지어져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유추와 달리, 구 안성군청은 건립 당시부터 특별히 신경 쓴 모양새다. 지방도시 공공관청은 목조나 비늘판 붙임의 마감으로 지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붉은 벽돌 치장 쌓기로 좌우 대칭의 외관을 가졌다는 것은 당시에도 흔한 형태는 아니었다는 설명이다.특히 길이쌓기와 마구리쌓기를 교대로 이용해 쌓은 벽돌쌓기 방식은 내력벽식 구조에서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창호 주변의 벽돌쌓기 패턴은 벽돌쌓기를 미학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문화재청도 구 안성군청을 조사하면서 건물의 특징이 지방의 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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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3)] K-웹툰 뿌리 간직한 '부천 한국만화박물관' 지면기사
당신의 인생 만화는 무엇인가요?세대가 다르고 성별이 달라도 누구에게나 인생 만화 하나쯤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볼거리, 즐길거리가 차고 넘치는 요즘에도 글과 그림이라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형태의 기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만화는 강한 흡입력과 호소력으로 사람들을 매료한다. 한국 최초의 만화로 인정받는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1면에 게재된 이도영 화백의 삽화로부터 전 세계 콘텐츠 기획자들이 주목하는 웹툰까지 100년이 넘은 한국 만화 역사에 수 많은 만화가 등장해 대중들과 함께 웃고 울었다.문화콘텐츠 가운데 만화만큼은 세계 4대 강국으로 꼽히는 한국, 세계 최초로 웹툰형식을 개발해 전 세계의 이야기꾼으로 떠오른 한국. 한국인의 DNA 속에 담긴 만화 사랑을 쫓아본다. 1909년 이도영 화백 '대한민보 삽화' 최초 만화로 인정해방후 김용환 '토끼와 원숭이' 당시 사회 혼란상 반영이산 위로한 김종래 '엄마찾아 삼만리' 첫 베스트셀러한 때 '사회악' 취급·시사만화 검열 등 입지 타격에도디지털·웹툰 시대 열리며 세계적 인기… 전성기 맞아 만화도 문화재가 될 수 있나요만화는 한때 유해하다거나 다소 낮은 수준의 문화콘텐츠로 인식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만화의 출발점을 보면 비유와 상징으로 사회상을 고발하고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위로를 건네는 작품들이 많다. 특히 한국 만화사를 보면 해방 이후 예술·문학 등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다.▲ 토끼와 원숭이한국 최초의 만화책 단행본으로, 우리나라 현대만화의 개척자인 김용환 화백의 작품이다. 1946년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이후의 정치사를 한국을 토끼로, 일본을 원숭이로 빗대어 풍자했다. 평화롭게 지내던 토끼 나라를 원숭이 나라의 군대가 무력으로 점령해 토끼들을 탄압하고 원숭이처럼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또 원숭이가 뚱쇠나라(중국)을 침략, 뚱쇠나라가 여우와 호랑이(강대국)에 구조신호를 보내지만, 센이리(미국)가 싸움에 끼어 원숭이의 항복을 얻어내는 내용이 줄기를 이루고 있다. 또 토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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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2)] 120년 역사 순례지 '파주 갈곡리 성당' 지면기사
천주교 순교자 기념 순례지이자, 경기도 근대문화유산인 '파주 갈곡리 성당'은 파주 자웅산과 노고산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성당이다. 120년의 역사를 품은 갈곡리 성당은 소박하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편안한 분위기에서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다. 갈곡리 성당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이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구한말 천주교 박해 끝나며 마을 형성1898년 신자들 약현본당 칠울공소 설립신앙 공동체 이루며 옹기 만들어 생계'위령기도에 음' 한국만의 특징 시작도한국전쟁때 피폭… 주민들 힘모아 성당 건축미군 기술·자본 도움… 1954년 현재 모습으로인민군에 희생 김치호 신부·김정숙 수녀 기려순례지 지정… 성당 중심 신앙 공동체 여전 굳은 신념과 같이 우뚝 선 갈곡리 성당갈곡리 성당의 역사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뤄 옹기를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던 신앙공동체로부터 시작한다. 갈곡리 주민들이 1936년 마련한 공소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폭격으로 소실되면서 지금의 갈곡리 성당이 건립(1954년)된 것이다.총 면적 199.2㎡의 벽체, 지붕부, 종탑부로 구성된 화강암 석조건물로,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1950년을 전후한 시기 성당 건축은 열주(지붕 아래 대들보를 받치며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다수의 기둥)가 사라진 형태가 대부분인데, 갈곡리 성당도 그 중 하나다.수직 종탑과 정면 양식, 성당의 뒷부분 등 세부 모양은 고전적 형태를 그대로 따른 지금의 모습으로 건축됐다.양주시 회천면 덕정리의 채석장에서 채석한 화강암을 성당을 짓기 위한 석재모양으로 다듬어 이 곳으로 옮겨왔다. 이 과정을 미군이 도왔다는 점과 의정부주교좌성당과 같은 화강암 석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양주시의 명물인 독바위에서 유래한 화강암으로 보인다. 다만,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해 건물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 지붕은 함석으로, 내부 바닥은 마루를 깔아 만들었다.갈곡리 성당은 당시 해병대 군종신부인 김창석 타대오 신부가 미국 군종신부인 에드워드 마티뉴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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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1)] 잊힌 계몽운동의 현장 '군포 둔대교회' 지면기사
#군포 둔대교회 #경기도근대문화유산 #문화유산탐방 #계몽운동 #3·1운동 #민족사 #야학군포시 도심을 살짝 벗어난 둔대동 반월호수 인근에는 호수의 풍광을 살린 대형 카페와 식당이 자리 잡았다. 그 뒤로 좁은 산길 하나를 따라가면 고택 한 채가 제멋대로 우거진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이 '군포 둔대동 박씨 고택'. 1930년대 군포지역 농촌계몽운동을 이끌던 박용덕 선생의 집이다. 고택을 뒤로하고 한여름의 더위와 습기가 키운 수풀들 사이로 걷다 보면 언제부터 그 자리를 지켰을지 모르는 오래된 건물이 나온다. 이곳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키운 계몽운동의 현장, '둔대교회'다.■ 소박하지만 살아 숨쉬는 둔대교회1936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53㎡ 1층 규모의 둔대교회(기독교대한감리교 둔대케노시스교회)는 한옥과 서양의 건축사적 특성을 보이는 근대 한옥이다. 일반적인 우리나라 주택이 정면에서 출입하는 반면, 둔대교회는 서양 건축문화의 영향을 받아 출입문이 우측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이 또한 건축사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보이는 특징일 것이다. 크고 잘 지어진 교회가 흔한 요즘, 얼핏 보면 소박한 외양일 뿐이어서 명패만 없었다면 이곳이 교회인지, 민가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듯하다. 그럼에도 90여년 가까이 수많은 사람들이 거쳤을 이 공간이 현재의 수준으로 깨끗하게 유지된 데에는 관심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창틀이 알루미늄 창호로 바뀌고 지붕이 기와로 보수됐으며, 입구와 천장, 벽면에 샌드위치 패널을 덧댄 점이 과거의 모습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과거에 머물러 있는 공간이 아닌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일상에서 살아있는 공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골조는 이 건물이 세워진 1936년(추정) 당시 그대로 남아있다. 또 1937년 건물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남아있어 지금이라도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근현대사의 아픔을 함께 겪은 둔대교회둔대교회는 지난 4월 경기도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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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0)] 강점기의 독립 열망 담아낸 '근화창가 제 1집' 지면기사
'금지곡=공공장소나 방송에서 부를 수 없도록 규정된 노래.'표절이나 저속한 가사 등 곡마다 금지 사유가 붙어있지만, 숨은 의도가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근현대사에 등장한 수많은 금지곡 가운데에는 아픈 역사가 담긴 금지곡이 있다. 경기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평택 '근화창가'가 그렇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근현대사를 관통한 비극적 시기에 사연 없는 금지곡이 어디 있겠냐 싶지만, 민족과 역사를 노래할 자유마저 빼앗긴 과거가 아프다. 무엇보다 근화창가에 수록된 곡이 이제는 잊힌 곡들이라는 점이 아쉬움을 더한다.근대 일본·서구 음악에 맞춰 제작된 '창가' 계몽적 가사·씩씩한 느낌 특징조선 역사·고난 극복 등 내용 '금지 처분'… '총독부 창가집'과 정반대 성격'금지 창가집 희귀본' 故 노동은 교수가 발굴·소장… 유족들, 평택시에 기증'조지아 행진곡' '하이카라부시' 등 당시 유행곡 차용… 음악사적 가치 커'한국근현대음악관'에 보관… 민족음악 지킨 지영희 기린 '국악관'도 바로 옆 ■ 근화창가 제1집창가는 근대기 한국에 수용된 일본 및 서구 음악에 맞춰 제작된 노래로, 창가집은 주로 계몽적 가사와 씩씩한 느낌이 나는 특징을 띤다. 주로 교과서처럼 사용됐다. 평택 한국근현대음악관이 보유하고 있는 근화창가 제1집은 일제강점기에 금지된 항일·애국창가집으로 금지된 창가집 가운데 3번째로 실물이 발견된 희귀본이다.1921년 민족음악가 노영호가 펴낸 창가집으로, 1923년 3월 10일 2판이 나오기도 했다. 당초 계획은 제2집, 제3집과 같이 시리즈로 제작할 계획이었겠으나, 1집을 끝으로 근화창가의 이름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를 제작한 노영호는 출판사 무궁화를 뜻하는 근화사의 사주로 근화창가집 출판을 맡았다. 또 제작에 있어서 작·편곡자, 작사가로도 참여한 인물로 알려졌다. 가로 12.6㎝, 세로 19.5㎝(초판본 추정)와 가로 12.7㎝, 세로 16.3㎝(이판본 추정)에 민족의식이 담겼다. '조선의 자랑'과 '을지문덕', '강감찬', '어머니의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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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9)] K-팝 태동 이끈 파주 장파리 미군클럽 '라스트 찬스' 지면기사
# 경기도문화유산탐방# K-팝의뿌리 # 대중음악의산실# 꿈의무대 # 미군 # 역사의명암 # 라스트찬스"일제 강점기를 겪고 한국전쟁으로 눌릴 대로 눌린 한국인의 흥이 다시 폭발할 수 있던 계기가 파주 라스트 찬스 아니었을까." 파주 파평면 장파리의 한 주민은 화려했던 1960·70년대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한국 대중음악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미군 클럽이다. 흔히 미 8군을 중심으로 얘기하지만 1960·1970년대 미군 부대 인근에 들어선 수 많은 클럽들이 외화벌이에 나서고 있었다.미군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클럽들은 블루스에서부터 재즈, 하드록 등을 연주할 수 있는 밴드를 무대에 세웠는데, 실력만큼은 미국 현지에 웬만한 밴드를 능가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활동했던 밴드들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음악에 가장 빠르게 반응했고, 유행은 빠르게 한국의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미군클럽은 당시 아티스트뿐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고 배우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꿈의 무대였다. 그때의 청년들이 미군에서 내국인으로 대상을 넓히면서 한국 대중음악이 르네상스를 맞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문화와 문화, 빛과 그림자가 엉킨 공간 장마의 한 가운데를 지나는 7월 초의 덥고 습한 날씨에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에는 지나는 행인 하나 보이지 않았다. 특별할 것 없는 접경지역 시골 마을의 풍경이었다.그러나 이 마을이 특별한 건, 한국과 미국의 문화가 뒤섞이고 또 한국 근현대사의 명과 암이 뒤엉킨 장소 '라스트 찬스 클럽'이 위치하고 있다.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마을 초입에 위치한 160㎡ 넓이의 단층 건물로, 입구 옆에 'LAST CHANCE'라고 적인 간판이 없었다면 낡고 작은 식당, 심지어 창고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특징을 찾아보자면 건물 외벽 조약돌 모자이크 장식이 독특하고, 미국 서부 개척시대 상점건축과 같은 느낌을 준다. 1950년대 세워진 '조약돌 장식' 건물그리스·이집트 등 다양한 문화 담아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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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8)] 양평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혈의' 지면기사
장마를 앞둔 6월 말. 덥고 습한 날씨에도 양평군에는 활기가 돌았다. 자전거를 타고 자연을 즐기려는 방문객과 연잎이 수놓은 두물머리를 즐기려는 관광객 등이 지역에 활기를 더했다.양평군 양서면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에도 평일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되는 탄신 136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몽양을 잇다-몽양의 눈빛'을 관람하려는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19세기 태어나 대일항쟁기 최고의 셀럽(유명인을 뜻하는 Celebrity의 줄임말), 몽양 여운형의 삶과 그가 남긴 유산을 쫓아본다.독립운동가, 사상가, 언론인….1886년 5월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태어난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사상가, 선교사, 언론인, 여행가, 교육자로 알려져 있다. 190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노비 문서를 불태워 해방했으며, 고향집에 기독교 광동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배우 송강호 주연의 영화 'YMCA야구단(2002)'으로 알려진 한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 야구부 주장으로 일본 원정경기까지 다녀온 인물이기도 하다.무엇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신한청년당의 발기인이자 도쿄에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한 독립운동가,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해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면서 사임할 때까지 언론인으로 살았다.아버지 사망후 노비 문서 불태우고고향집에 '광동학교' 세워 신학문 교육도쿄에서 '독립 역설'… 대중적 인기 광복을 맞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1947년 암살됐다는 것이 그를 설명하는 이력이다.대일항쟁기에 극좌와 극우 모두로부터 외면받으면서 2008년 뒤늦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기까지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잊힌 인물이기에 몽양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설명이다.19세기에 태어난 21세기형 셀럽"오직 인간은 낳을 때부터 평등이니 주종지의(主從之義)는 어제까지의 풍습이요. 오늘부터는 그런 오래된 생각을 탈피하고 제각기 알맞은 직업을 찾아라."배재학당, 우무학당에서 공부하며 신학문을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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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7)] 오산 'UN군 한국전쟁 초전기념비·옛 동판·한국노무재단 안내판' 지면기사
1950년 7월 5일 오전 8시 16분. 오산 죽미령에서 지축을 흔드는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한국전쟁에 미 지상군 참전을 알리는 소리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 제24사단의 일부 병력이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으로 향했다. 7월 1일 더글라스 C-54기를 타고 미군 540명이 일본 후쿠오카를 출발해 부산에 도착했다. 지휘관을 맡은 제21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로 불린 이들은 연일 쏟아지는 장맛비를 뚫고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다시 대전에서 오산 죽미령으로 이동해 전선을 형성했다. 조그마한 능선이지만 경부국도와 철도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에서 스미스부대원들은 향후 3년여간 이어진 전쟁의 신호탄을 쏜 셈이다.1950년 7월5일 오산 죽미령서 '미군 첫 전투'당시 주역 '스미스 특임대' 장병들 휴전후 방한540개 돌로 '구 초전비' 쌓아 전우들 희생 기려개인 땅에 지어져 이전… '신 기념비' 건립돼'옛 기념비 동판' 한때 분실… 하와이서 발견지갑종씨가 사들여 미군 도움으로 들여와'KSC 안내판' 1972년 미군이 주변 정리뒤 부착2020년 죽미령에 스미스평화관·평화공원 개장 유엔군 초전기념비오산에는 두 개의 초전기념비가 있다. 구분하기 쉽게 '구(舊)'라는 접미사가 붙은 초전기념비는 한국전쟁이 중단된 직후 1955년 스미스 부대 장병들이 돌아와 전사한 전우를 기리며 540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전투 당시 B중대 1개 소대가 배치됐던 99고지에 위치해 1990년대까지 오산주민들 사이에서 'UN탑'이라고 불렸다.또 하나는 1982년 4월 건립된 것으로 1980년 화성문화원장이 국방부장관과 교통부장관, 경기도지사 등에 건의해 마련된 '신(新) 초전기념비'가 있다.이 가운데 구 초전기념비는 불리한 전황 속에서 역사성을 인정받아 ▲초전기념비에 부착됐던 옛 동판 ▲한국노무재단(KSC) 안내판과 함께 경기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이들 경기도문화유산은 UN군 초전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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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6)] 안산·시흥 염전 달리던 '소금운반용 궤도차' 지면기사
영화 '엄마없는 하늘아래(1977)'의 첫 장면은 황량한 염전 풍경과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이 대조를 이루며 시작된다(왼쪽 스틸컷). 스치듯 지나가는 1970년대 염전의 풍경에는 목조 창고와 줄 지은 전봇대 등으로 이국적인 느낌마저 든다.이 가운데 화물차라고 하기엔 적재 공간이 길고, 열차라기에는 작은 탈 것 하나가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열차 보다 작은 꼬마 열차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염전에서 소금을 운반할 때 사용하던 이른바 '가시렁차'라고 불린 궤도차다.안산·시흥, 근현대 소금산업 중심1969년 수입산 유입에 위기 맞아신규 염전 개발로 부흥기도 잠깐시화지구 개발·오염에 쇠퇴일로국내 제염 산업은 고려시대 기록물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그간 관련 유물이 문화재로 지정된 적은 없었다. 경기도가 지난해 안산 동주염전 소금운반용 궤도차를 경기도 등록문화재로 등록한 것이 사실상 최초의 사례가 됐다.소금 산업은 어떻게 안산·시흥, 경기도민의 삶을 지탱해왔고, 왜 하향길을 걸었을까. 동주염전 소금운반용 궤도차가 지나온 궤도를 따라 소금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해본다.환경 오염이 앗아간 삶의 터전, 경기도 염전 서해는 조석간만의 차로 소금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근현대 소금 산업의 중심이 안산·시흥이었다는 사실과 활발하던 경기도 제염산업이 환경오염으로 사실상 맥이 끊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운반용 궤도차' 발견해 복원한때 한번에 20량·시속 20㎞ 운행염전 한켠에 십수년간 잊힌채로"안산 생활사 자료 보전 노력 필요"1908년 발간된 '한국염업조사보고'에 따르면 인천, 김포와 함께 당시 안산군은 제방이 없는 염전으로 유명했다. '한국수산지(1911)'에서도 '안산군 연안에는 염전 개발을 위해 적당한 곳이 적지 않다'며 '1년 생산액은 약 336만근(2천t)'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안산지역의 제염 산업은 역사가 오래됐고 주요 소금 생산지로서 주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인근 시흥시 정왕동 일대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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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5)] 안산 산업화의 증인 '경3륜 T600' '목제솜틀기' 지면기사
오는 7월 정식 개관을 앞둔 안산산업역사박물관. 화랑호수를 뒤로 한 박물관의 고요한 외부 풍경과 달리, 안산시의 산업역사를 망라한 박물관 내부는 관람객들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전시물들을 두르고 있는 포장재 속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숨겨져있었다. 안산산업역사박물관은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오래된 첨단'이 잠들어있다. 대표적으로 경기도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아 3륜 T600'과 '목제 솜틀기', '동주염전 소금운반용 궤도차' 등이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과거의 첨단들이 지금의 안산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안산을 넘어 경기도, 대한민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제조업의 정점, 자동차 산업자동차 산업을 제조업의 정점으로 보는 산업 전문가가 적지 않다. 해외에 수출할 정도의 수준을 갖춘 자동차 회사가 있는 나라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만 봐도 이런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전후, 아무런 기반이 없던 대한민국이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갖추게 됐을까.한국 최초의 자동차가 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들어온 이래, 자동차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1920년대에는 전문 정비소·제조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자동차도 크게 줄었지만 드럼통과 미군 폐차에서 얻은 엔진으로 재생 자동차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1955년에서야 국내 기술·인력으로 조립된 최초의 자동차 시발 자동차가 등장하는 데, 이미 국산화율이 50%에 달했다는 점에서 재생 자동차를 다룬 경험이 토대가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자동차 공업 5개년 계획이 발표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의 노력도 크게 기여했다.이후 시대를 특징할 수 있는 여러 자동차 모델이 나왔지만, 안산산업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경3륜 T600은 한국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제품이다. 기아자동차가 자전거 부품 제조 공장에서 대표적인 자동차 생산업체가 되는 과정을, 또 작지만 효율적인 디자인으로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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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4)] 부천 '한미재단 소사 4-H 훈련농장 사일로' 지면기사
벚꽃이 한창인 4월의 부천 소사 여우고개. 벚꽃비가 내리는 풍경 사이로 건물이라기보다는 폐창고에 가까운 건물 몇 동이 화사한 경치와 대비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8동의 건물과 굴뚝같은 모양의 사일로(가축 사료인 사일리지를 만들어 저장해 두는 원통형 창고) 하나가 남아, 이 곳이 농업국가였던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만든 '부천 한미재단 소사 4H 훈련농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한때 전국에서 몰려든 훈련생들로 활기가 넘쳤던 곳이지만, 지금은 이 건물 몇 동만이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지금은 그 기록도 찾기 힘든 한미재단 훈련농장에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의 결과가 어떤 과실로 맺어졌을까.전후 한국사회에 상당한 영향 끼친 한미재단 한미재단(American Korea Foundation-AKF)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설립된 비공식 원조기관이다.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구호단체가 설립됐는데, 그 중 한미재단은 피폐해진 전후 한국을 체계적으로 지원했다.사절단이 먼저 현지조사를 수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구호활동을 펼쳤는데, 미국 내에서 기부받은 물품과 기금이 한미재단을 통해 전달되면서 한국의 보건에서부터 사회복지, 교육 등 적재적소에 적절히 분배될 수 있었다.특히 농업구조와 농촌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조직된 청년단체 4-H와 함께 한국 농업 전반의 고도화를 견인, 경제적 기초를 닦아 지금과 같이 선진국 반열로 도약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다.그런 한미재단은 왜 부천에 4-H 훈련농장을 지었을까. 부천은 가까이 서울과 인천을 마주하고 있어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경기도농사시험장·잠종제조소·소사연초시험장 등이 당시 부천에 자리했던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한국전쟁 비공식 구호단체 '한미재단'서울·인천 가까운 부천에 훈련농장 건립 한미재단은 전후 복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4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미국 방문 중 한미재단 만찬회에 참석해 한국의 재건 의지를 강하게 피력한 연설을 봐도 그 중요성을 가늠해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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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3)] 말레이지아교 지면기사
4월의 따스한 봄 햇볕이 내리는 날의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과 금촌·광탄을 오가는 차량들이 쉴새 없이 고산교를 통과하고 있다. 그 옆으로 생긴 지 오래돼 보이는 다리 하나는 과거 자신의 역할을 고산교에 잠시 양도하고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오래된 다리 하나가 경기도근대문화유산인 '말레이지아교'다. 여느 도시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리 중 하나로 보이지만, 콘크리트를 긁어서 새긴 듯한 '마레이지아교'라는 글자와 건축연도 등이 말레이지아교가 떠받쳐온 시간의 무게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 2019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은 그 해 첫 해외순방일정으로 말레이시아를 방문했다. 일정 중 하나로 한-말 비즈니스포럼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1960년대에는 말레이시아가 보내준 원조금으로 한국 파주에 '말레이시아교(현 말레이지아교)'라는 다리를 지었다"며 오랜 우호 관계를 자랑했다. 이어 "20여년 후에는 반대로 한국기업이 말레이시아에 '페낭대교'를 세우기도 했다"며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을 두 교량을 통해 소개했다.소박한 교량, 국가 경제의 자부심 되다.길이 60m, 폭 7.4m. 2차선의 철근콘크리트로 어떠한 멋도 내지 않은 교량이다. 1966년 아직 우리나라가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의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할 때, 말레이시아 정부가 보낸 대외 원조자금 5천 달러 상당으로 건설이 추진됐다. 경기도와 당시 파주군도 각각 300만원, 200만원을 보태 경기북부 경제의 핵심 지역인 조리읍에 말레이지아교가 들어설 수 있었다.경인일보(당시 제호 인천신문)와 대한늬우스 등에서 준공식 당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데 수백명의 인파가 몰려 말레이지아교의 개통을 축하했다.독특한 멋이나 건축양식이 있는 것도 아닌 말레이지아교가 주목을 받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경제의 자부심을 상징이기도 해서다. 한국전쟁의 상처서 못 벗어난 1966년말레이시아 정부의 '5천 달러' 원조해외 원조가 필요한 시기를 보냈던 한국이 20년도 채 되지 않은 1982년 말레이시아에 동양 최장의 사장교를 건설하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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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2)] 방화수류정 자개상, 근대건축도면 일괄 지면기사
화홍문은 '수원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엄밀히는 화홍문의 수문 7곳을 통해 쏟아지는 물보라와 어우러진 '화홍관창'의 모습을 8경 중 하나라 말한다. 가족과 연인의 나들이 장소는 물론, 밤의 비경이 미려해 한 데 모여 있는 방화수류정·용연과 함께 경기도의 대표 관광 코스로도 각광을 받는 '화홍문의 물보라'는 사실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장마철 취수원인 광교저수지에서 수량을 댐을 통해 방류할 때가, 평소에 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철철 넘치는 물보라로 변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지난해 10월 선정된 경기도 등록문화재 11건 가운데 수원에 있는 문화재는 2건이다. 두 문화재 모두 화홍문과 엮여 있는 문화재란 점이 흥미롭다.수원박물관에 소장돼있는 '방화수류정 자개상'과 '수원 화홍문 기타복구공사설계도'가 포함된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도면 일괄'(94점)이 도 등록 문화재로 모두 일제강점기 때 제작됐다. ■'방화수류정 자개상', '사통팔달' 수원의 숨결'방화수류정 자개상'은 일제 강점기 때 제작된 공예품으로, 수원 화성의 주요 문화재인 방화수류정과 용연, 화홍문이 한 데 어우러진 보기 드문 자개상이다.자개 조각을 모양대로 잘라 넣는 근대의 나전기법을 활용한 공예품으로서 마치 풍경화를 입힌 듯 상판의 회화적 문양이 정교하게 들어간 것이 큰 특징이다. 상의 네 곳 모서리와 다리에도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는 점에서는 이 작품을 대했던 당대 예술가들의 진중한 마음과 노고도 엿볼 수 있다.이 자개상의 제작 연대(1910년대 중반~1936년)는 상을 뒤집으면 보이는 '이화형美'의 표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 표식은 수원을 비롯한 대도시를 배경으로 당시 관광, 예술 산업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찍은 일종의 '상표'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대한제국 황실의 지원을 받아 1908년에 '조선의 전통적 공예미술의 진작'의 취지로 만들어진 '한성미술품 제작소'에 뿌리를 둔다. 이를 1911년 일본인이 넘겨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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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 전쟁의 상흔이 깃든 '피난민 태극기' 지면기사
시간은 흐르지만, 사람은 시간에 뿌리를 박고 줄기를 뻗는다. 시간을 양분 삼아 뿌리로, 줄기로, 가지로 삶은 뻗어나간다.우리가 근대문화유산을 발굴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전통문화유산에 비해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근대문화유산에는 찬란한 과거의 영광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과 한국전쟁의 상흔, 산업화 시대를 헤쳐온 선배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지금 우리의 일상이 선배들이 일궈놓은 토대에서 나온 것인 만큼 근대문화유산만큼 우리 사회의 모습과 나아갈 방향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경인일보는 경기도의 근대문화유산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는 대화의 장을 만든다. → 편집자주1987년 8월 31일미 육군 2사단 소속 중령 존 휘트만은 평소 알고 지내던 당시 동두천시 광암동 동장에게 낡은 태극기 하나를 꺼내 보였다.한국전쟁에 참전하셨던 아버지가 한 피난민에게 받은 태극기라고 간략하게 소개한 태극기. 이미 음양陰陽을 뜻하는 태극 무늬에서 양陽에 해당하는 붉은 색 염료는 빛이 바라 흑백 필름으로 비춘 모습같이 보였다.우리가 흔히 쓰는 태극기에 비해 태극 무늬는 크고 상대적으로 건곤감리乾坤坎離가 작게 그려져 있어 태극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에서 제작된 것이 아닌, 누군가가 직접 그려서 만든 태극기로 보였다.또 앞면만 채색됐다는 점에서 공식적인 행사나 선체 등 밖에 걸기 위해 제작된 태극기가 아니라 액자와 같은 것에 넣어져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는 태극기였다.존 휘트만 중령이 전달해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다는 간단한 사연 외에 특별한 내력이 전해지지 않았던 낡은 태극기는 '피난민 태극기'라는 이름으로 2002년 5월 동두천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 개관할 때 다시 기증돼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있다.태극기의 꿈그간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유추해보자면, 피난민 태극기는 한국사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하다.한국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가까스로 전세를 반전시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