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기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7
지난 19일 수원시 인계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설원기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가 대화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화가·교수로 수십년… 공직은 시대적 역할 고민 결과
엘리트적 관점 강한 문화탓 공연에 집중된 정책 '문제'
음식·건축등 생활과 연결된 다양한 콘텐츠 제공 중요
재단내부·道 기관 막혀있는 소통의 실마리 풀기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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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다는 건 머리카락 색깔로만 판단할 수 없다. 검은 머리카락이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사고가 늙고 낡았다면 젊음은 표출되지 않는다. 지난 12일 경기문화재단의 새로운 수장이 된 설원기(65) 대표이사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머리가 희끗하고 주름이 파인 온화한 얼굴이었지만 분명 그는 젊음을 가지고 있었다.

경기도민에게 설 대표는 이방인이다. 재단을 맡기 전까지 그는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가로 살아왔다.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했다. 덕성여대와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로 수 십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림 말고 그를 대중과 연결시켜줄 특별한 매개가 없었다. 그래서 낯설고 생소하다.

안정된 삶을 살아오던 그가 갑작스레 공직에 나선 이유는 뭘까. 게다가 경기문화재단은 얼마 전까지 전(前)대표이사와 직원들 간 불화로 내홍을 겪기도 했다. 부침이 있었던 기관의 수장이 되겠다는 결심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설 대표는 "재단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권유가 있었다. 그렇게 고민을 시작했는데, 그간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재단의 역할과 내가 추구했던 것들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대답했다.

재단과 그가 맞닿아 있는 것, 그것은 젊음이다. 그는 예술가이자 선생으로 수많은 젊음과 살을 부대끼며 살아왔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시대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그림의 시대적 역할을 고민해야 했고, 교육자로서 그림을 전공하는 수많은 후배들에게 그 역할을 규명해줘야 했다.

그러려면 그들이 예술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업에서, 술자리에서, 여행지에서 학생들과 끊임없이 소통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예술대학 학생들은 한밤 중에 교수에게 술 한잔 하시게 나오라고 전화를 한다. 방학이 되면 학생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그 곳에서 작품을 가르치고 함께 느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오랜 시간 운영했던 대안공간에서도 드러난다.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은 1997년부터 그가 예술가 동료 5명과 함께 운영했던 전시공간이다. 오로지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대안공간이다.

1년에 5번씩 가능성은 있지만 전시할 여력이 없는 작가를 선정해 그의 작품을 전시한다. 작가를 선정할 땐 이름도 이력서도 보지 않고 온전히 작품으로만 평가한다. 선정된 작가가 예술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사비를 털어 500만원의 전시지원금도 지원했다.

"지금은 그래도 미술관마다 젊은 작가를 양성하기 위해 전시기회를 제공하지만, 당시만 해도 젊은 작가들의 전시기회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전국대전에 나가지 않는다면 대부분 자기 사비를 털거나 빚을 져서 전시를 해야 했다." 젊음에 대한 관심과 안타까움, 연민은 그를 움직이고 실천하게 했다.

경기문화재단의 역할도 젊음을 지키는 것이다. 재단의 본래 설립목적은 창작자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창조해내는 이들을 지키자고 만들어진 곳이다. 이 곳의 수장으로 설 대표가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당연한(?) 일 외에도 설 대표가 경기도 문화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할 일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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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대표는 "아직까지 문화, 예술이라 하면 엘리트적인 관점이 강해서 작품이나 공연을 보는 데만 문화정책이 집중돼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다녀야 문화예술을 경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생활문화'를 강조했다.

"TV를 보면 음식, 건축 인테리어, 생활용품 등 다양한 콘텐츠들이 사람들의 미적 관심을 끌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나를 둘러싼 주변환경이, 더 나아가 내 삶이 아름답길 바란다. 그러려면 단순히 작품과 공연을 보여주는 식의 이벤트성 문화정책이 아니라 생활을 포함하는 통합적인 콘텐츠를 제공해 지속성을 높여야 한다."

이는 경기도 내 북쪽과 남쪽의 문화적 격차 현상과도 연결된다.

"공기관에서 격차를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소득에 상관없이 질 좋은 문화를 모두 체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많이 만드는 일이다. 이를테면 뉴욕시에는 건물이 밀집돼 있어 사람을 위한 공간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용적률이나 고층제한을 완화하는 대신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건물 1층에 마련하도록 하는 'POPS'제도가 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도 도시 내 다양한 생활공간을 활용해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를 창조해 나가는 게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사실 이런 노력들은 재단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경기도에는 도민을 위해 일하는 다양한 기관들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각자 맡은 일에만 충실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

그는 소통이 부족했던 건 기관만이 아니라고 했다.

"재단 내부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는 것 같다. 팀끼리, 본부끼리 자기 역할에만 집중하고 분야를 넘나드는 협력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보고서 위주의 일처리도 이런 분위기에 한 몫 한다. 직원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서를 써야 하는, 혹은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이 생기면 부서별로 미루기 바쁘다."

그래서 그는 재단 안에 막혀있는 소통의 실마리를 푸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경영진이나 본부에 치이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경영진에서 혹은 본부에서 하달하는 지시사항이나 일방적으로 결정해 아래로 내려오는 식의 의사결정 방식이 소통을 어렵게 하고 있다. 다함께 문제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방식을 도입할 생각이다. 본래 재단에는 부처장 위주로 구성돼 의사결정을 진행했던 운영위원회가 있었는데 본부체제로 바뀌면서 본부장, 기관장 위주로 결정방식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체계를 개선해 모두가 함께 결정하고 협력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키겠다."

사실 재단 대표의 임기는 2년이다. 하고자 하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다 여기면 변화 없이 시간은 그대로 흘러가버린다. 그의 2년은 어떤 모습이길 바랄까.

"생각하는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재단이, 경기도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해주고 떠나고 싶다. 적어도 그 기반을 탄탄히 만들어 놓으면 다음 분이 그것을 토대로 더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경기문화재단이 하면 뭔가 다르다'라는 평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설원기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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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1974년 미국 벨로이트대 미술과졸
1981년 미국 프랫대 대학원 회화과졸

경력
1993~1998년 덕성여대 서양학과 교수
2009년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원장
1998년~201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교수(현)

활동사항
개인전 10회(뉴욕, 인도, 서울), 그룹전 국내외 20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