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곧 문자의 역사다. 허공으로 사라지던 말에 생명을 불어넣고, 시공의 한계를 뛰어넘게 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400여 종에 달하던 세계의 문자 중 살아남은 것은 30여 종에 불과하다. 거듭된 생성과 소멸 속에서 독창적인 한글은 민족 문화를 꽃피운 토대였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한글 뒤편에 있던 시각장애인의 손끝에는 오래도록 글자가 닿지 않았다. 제생원 맹아부 교사였던 송암 박두성(1888~1963)은 세상을 읽지 못하는 고통에 주목했다. 조선어 교육마저 핍박받던 일제강점기, 시각장애인들이 일본어 점자에 의존하는 현
“군대 안 갑니다.” “군 면제라는 그런 동기부여가 있었다.” 주장 이기혁과 양민혁의 인터뷰는 귀를 의심케 한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일본을 꺾고 남자 축구 4연패라는 대업을 이룬 직후였다. 그 순간 금메달은 ‘병역 탈출 티켓’으로 추락했다. 박승수는 소셜미디어에 전역모 인증숏을 올렸고, 최우진은 운동화 세리머니를 했다. 국민의 자부심에 생채기가 났다. 그라운드에 흘린 땀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린 것은 선수들 자신이었다. 태극마크는 명예이자 무거운 왕관이다. 해마다 20만 명의 청년이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시
런던 한복판에서 ‘까치와 호랑이’를 만난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2025)’를 통해 세계인의 친구가 된 서씨와 더피의 먼 조상들이다. 용상의 뒤를 지키던 ‘일월오악도’는 조선 왕실의 기품을 상징한다. ‘인왕제색도’는 벽면을 채운 영상과 소리를 타고 일렁인다. 한국의 박물관에서 유리창 너머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유물들이 세계인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첫 장면이 되었다. 영국박물관이 특별전 ‘한국: 2천년 창의의 여정’을 1일 개막했다. 1984년 ‘한국의 보물’전 이후 42년 만이다. 삼국시대의 정교한 장신구부
곱창 50인분, 방어 10㎏, 라면 20개. 한 사람이 삼켜내는 압도적인 양에 수백만 명의 시선이 꽂힌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역설적으로 타인의 밥상을 열심히 관찰한다. ‘먹방’은 이제 글로벌 미디어 지형을 흔드는 현상이 됐다. 2021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mukbang’을 한글 발음대로 등재했다. K팝, K드라마와 나란히 한류의 또 다른 이름이 된 셈이다. 먹방의 뿌리는 2000년대 후반 인터넷 방송 플랫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3년 아프리카TV가 먹방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밴쯔, 왕쥬, 더디바 같은 1세대 BJ들이
베트남은 한국어에 진심이다. 2021년 세계 최초로 초중등 교육과정에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채택했다. 지금은 164개 학교에서 3만4천여명이 한국어를 배운다. 1996년 하노이국립대에 처음 문을 연 한국어학과를 시작으로, 현재 54개 대학이 관련 전공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26일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이 주최한 ‘제5회 한국어 말하기 대회’는 뜨거운 한국어 사랑을 보여줬다. 역대 수상자는 베트남 삼성전자의 통역사로, 서울대에 진학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한국어는 꿈을 향해 오르는 사다리이자 세계로 나가는 문이다. “베트남이 아니라 비
“앞으로 근대5종 많이 많이 중계 부탁드리겠습니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지난 20일 대한민국에 1호 금메달을 안긴 성승민 선수가 인터뷰 끝에 남긴 말이다. 정중하지만 서운함이 역력하다. 한국 여자 근대5종 선수가 아시안게임 개인전 정상에 선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 생중계는 없었다. 근대5종이 2022 항저우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조직위원회의 중계 제작 종목에서 빠진 탓이다. 성승민은 2024 파리올림픽 동메달로 아시아 여자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승마가 장애물 경기로 바뀐 뒤에도 규칙을 탓하지 않았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감독 유하). 영화가 개봉한 지 스무 해가 넘었다. ‘애인? 아내? 어떤 걸로 할래.’ 카피부터 도발적이다. 연애와 결혼을 분리시킨 현실 로맨스가 화제였다. 가수 김연자는 ‘아모르파티’(2013)에서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며 싱글들을 다독였다. 당시엔 파격이었지만, 지금 오십 줄에 접어든 세대에겐 그저 담담한 현실이다. 50대 열 명 중 한 명은 ‘생애 미혼’이다. 93만4천명이 평생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2016년 28만1천명, 3.4%에서 10년 만에 3.3배나 늘었다.
비발디 협주곡 ‘사계’에는 계절마다 고유한 선율이 있다. 봄의 경쾌함과 여름의 열기, 가을의 풍요와 겨울의 추위까지. 인류는 오랜 세월 절기의 순환 위에 삶을 얹어왔고, 병마 또한 나름의 차례와 때가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야 마스크를 꺼내고, 초겨울 문턱에서야 독감 백신을 맞으러 병원을 찾던 습관이 그랬다. 절기가 어김없다는 믿음 위에 방역의 시간표도 짜여 있었다. ‘가을 기침은 낫지도 않는다.’ 가을에 터져 나오는 기침은 몸의 뿌리가 약해진 징후로, 그만큼 위험하다는 경험칙이다. 하지만 올해는 바이러스들이 절기마저 잊었다.
“AGI(범용 인공지능)가 도착했다.” 오픈AI의 새 모델 ‘GPT-6 아스트라’ 공개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남긴 화답이다. 인간처럼 스스로 추론하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한다. 사람이 평균 두 시간 걸린다는 48단계 캡차 패러디 테스트를, 이 모델은 단 4분 만에 뚫었다. AI가 “나는 로봇이 아니다”라고 우겨도 걸러낼 재간이 없는 수준에 이른 셈이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앞다퉈 차세대 모델을 쏟아내며 패권 경쟁에 불을 지피는 사이, 세계는 초지능의 등장 앞에서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어제까지 상상이었던 일이 오
오후 1시, 초등학교 정문 앞은 조용한 전쟁터다. 1·2학년 아이들은 몸집만 한 책가방을 짊어진 채 하나둘 문을 나선다. 태권도, 영어, 수학 학원의 노란 셔틀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직행하는 아이들,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귀가하는 아이들. 학교에 남은 아이들은 늘봄학교 교실로 발걸음을 돌린다. 같은 시각, 직장에 매인 학부모들은 스마트폰으로 아이들의 동선을 확인하며 신경을 곤두세운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초등 저학년 오후 3시 일괄 하교’라는 화두를 던졌다. 맞벌이 학부모의 사정을 생각하면 반가운 소식임에 틀림 없다. 학원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