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처럼 번진 직선제 열망… ‘직접민주주의 확대’ 토대 되다

 

두 사건 연결… 헌법 개정 이뤄내

산업·노동운동가들 거점 등 작용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최대 규모

현재 서명운동·주민청원 등 발전

오늘날 헌법은 1987년 10월에 개정됐다. 헌법을 기준으로 한국사회를 ‘87년 체제’ 등으로 부르는 이유다.

그해 6월 전국은 민주화 열망으로 들끓었다. 군부독재에 반대하며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두환 정권은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렇게 대통령 직선제를 뼈대로 하는 헌법이 개정되고 제6공화국이 탄생했다.

87년 체제의 주춧돌을 놓은 사건으로 인천5·3항쟁을 빼놓을 수 없다. 윤영상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연구교수는 “인천5·3민주항쟁과 6월 항쟁을 연결지어 봐야 한다”며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 속에서 진행됐고, 결국 헌법 개정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에 40주년을 맞는 인천5·3항쟁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5만명이 넘는 인파가 인천 남구(현 미추홀구) 시민회관사거리 일대에 모였다. 대학생과 노동자 등 각계각층이 들불처럼 거리로 나섰다. ‘군부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 ‘노동3권 보장’ 등 다양한 주장이 광장에 울려 펴졌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당시 야당이던 신한민주당은 그해 초부터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청주 등 전국을 돌며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을 개최했다. 개헌추진위원회는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당내 기구였다.

5월3일 인천에서 예정된 현판식을 앞두고 국내 정세가 요동쳤다. 앞서 같은해 4월29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임기 내 개헌 의사를 밝혔고, 신한민주당이 이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군부독재 청산을 요구하던 시민사회 안팎에서는 신한민주당이 정권과 결탁한 것이라며 비판 여론이 커졌다.

1986년 인천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데에는 정치·사회적 배경 외에도 인천이란 도시의 특수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시각이 있다. → 표 참조

인천지역 시민사회는 신한민주당 인천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이 예정된 5월3일을 총집결하는 날로 정했다. 특히 군부정권으로부터 가장 큰 억압을 당한 노동계가 중심에 섰다. 인천은 산업도시이자 당시 노동운동가들의 거점이었다. 인천과 인접한 서울 10여개 대학 학생들도 당일 오전에 결의대회를 가진 뒤 인천으로 집결했다.

5월3일 인천 남구(현 미추홀구) 시민회관사거리 일대에서 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10시간 동안 시위가 진행됐다. 정권은 물론 신한민주당 등 야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노동자, 농민, 대학생 등이 참여한 시위는 격렬했다.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은 무산됐다. 이날 319명이 연행됐고, 이 중 129명이 구속됐다.

전두환 정권은 대대적으로 인천5·3항쟁의 배후를 캤다. 이 과정에서 6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이듬해 1월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군부독재를 향한 들끓는 민심에 기름을 들이붓는 사건이었다. 전국에선 대학생, 노동자, 농민 등은 물론 화이트칼라까지 전면에 나서며 거센 항쟁으로 이어졌다. 바로 법정기념일인 6·10민주항쟁이다. 이 항쟁의 힘으로 그해 10월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민우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인천5·3민주항쟁은 현재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토대가 된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특히 다양한 직군·계층의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는 형태의 ‘간접민주주의’를 넘어 개개인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직접민주주의’ 요소가 컸다”며 “이는 향후 시민사회의 서명운동과 주민참여예산제, 주민청원 등으로 확대 발전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