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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19] 박세림 제자 '청람' 전도진 지면기사
"인천은 스스로 대한 민국 서예계를 이근 거목을 버린 것입니다. 역사가 판단할 것이며 후세가 비웃을 일입니다." 청람 전도진(58·서예·전각가·사진)은 "스승의 서예 삶이 고향 인천으로부터 버림받고 대전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이 터져 몇날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절이 지나고 사람이 잊혀진다지만 역사를 버려서는 안된다"면서 "선생님의 일생은 인천의 역사인 동시에 인천 서예계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청람이 이처럼 분통을 터뜨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동정 박세림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청람은 고등학교 다닐 무렵 동정과 처음 만났다. "중구 관동,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동정서숙이 있었어요. 무작정 붓글씨를 배우겠다고 이곳을 찾았고 당시 선생님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 였습니다." 그는 또 "선생님은 185cm의 장신에 몸무게도 90kg이 넘는 거구였다"면서 "기골이 장대한 사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항상 예를 중시하고 노력하는 진정한 예술인이었다"고 덧붙였다. 청람은 늘 동정과 함께 했다. 여름철 산사를 찾을 때는 묵동(墨童)으로 함께했고 동정이 마지막 예술혼을 펼치기 위해 서울행을 택했을 때도 함깨 했다. 그러기에 스승의 자취는 청람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다. 그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아직도 내 예술세계의 버팀목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람은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스승의 서계가 대전으로 옮겨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과 유품이 지역에서 버림받은 채 종적을 감췄다"면서 "문화·예술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지역이라면 오히려 대접받는 곳에 스승의 자취를 남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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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23] 장증손녀 김민자씨 내외 / 김기범의 막내딸 김애마씨 지면기사
■ 장증손녀 김민자씨 내외 "할아버지 업적·행적 자료 6·25전쟁때 소실… 아쉬움" "남긴 글이 없고 집에 보관중이던 자료도 6·25전쟁으로 소실돼 할아버지의 업적과 행적을 탐구할 수 없다는게 후손으로 부끄럽기만 합니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기범의 장증손녀로 현재 인천내리교회 집사이기도 한 김민자(46)씨와 남편 김제준(47) 권사는 요즘 증조 할아버지의 자료 발굴에 열정을 쏟고 있다. 김기범 목사는 아내 박루시 여사와 사이에 7남매를 뒀다. 그러나 2명의 딸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혼란한 시기 월북했고 나머지 자손들 역시 생업에 몰두하다 보니 선친의 업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김씨 부부는 "증조할아버지께선 당시 아들은 물론 딸들까지 미국에 유학보낼 정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던 것 같다"고 전했다. 이들은 이어 "교회사와 한국기독교 연구에 보탬이 되길 바라는 뜻에서 집안에 보관중이던 자료는 인천내리교회에 모두 기증했다"며 "선친에 관한 후손들의 고증과 기억을 사료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닐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 김기범의 막내딸 김애마씨 美유학 이대 총장서리 역임… 숨겨진 근·현대교육의 '거두' 김기범의 2남5녀 중 막내딸인 김애마(1903~1996년·사진)는 김활란과 더불어 인천이 낳은 한국 근·현대 교육의 거두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김애마는 선친이 설립한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이화학당(현 이화여대 전신)에 입학했다. 그녀는 이화보육학교 교원으로 4년간 근무하다 1932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시카고 에반스턴 내셔널교육대학에서 아동교육을 전공한 뒤 귀국해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39년 보육학교 학감으로 이화학원의 행정을 총괄하던 그녀는 1945년 8·15 광복 후 종합여자대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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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21] 이경성 수양아들 김달진 소장 지면기사
"여성잡지에 실린 미술자료를 모아 관장님께 보여드렸죠. 저를 보더니 '허허'하고 웃으시더라구요." 석남 이경성이 수양아들이라고 자랑하듯 얘기하는 김달진(50·김달진미술연구소장)씨. 그는 1977년 석남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석남은 홍익대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었고, 김 소장은 스물 한살의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우표, 깡통 등 닥치는대로 모으는 수집광이었는데 중학생이 되면서 '주부생활', '여원'과 같은 잡지에 실린 명화 한 장씩을 뜯어서 모아 미술자료집을 만들었어요."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경복궁에서 열렸던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보고 미술자료 수집을 직업으로 삼시로 결힘했다고 했다. "일간지와 월간지 기자, 각급 박물관 관장에게 나를 소개하는 글을 보냈는데 관장님만이 '홍대 박물관으로 한 번 오라'고 연락해주셨죠. 뛸듯이 기뻤어요." 이 인연으로 석남이 초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1981)에 오르자 그는 미술관 자료실 임시직으로 특채됐다. 지금은 피는 나누지 않았지만 더 끈끈한 부자지간이 됐다. 김 소장은 요즘도 일요일 마다 부인과 아들, 딸을 데리고 석남이 머물고 있는 서울 평창동의 노인간호센터를 찾는다. 아이들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잘 따르고, 부인도 며느리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했다. 김소장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 죄송할 따름이죠. 세월이 흐르면서 관장님이 사람을 더 그리워하시는 것 같은데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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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22] 인천박문초교장 강경수 수녀 지면기사
인천박문초등학교 복도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역대 교장선생님들의 사진은 개교 105주년을 맞은 이 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이 학교의 설립자 겸 제1대 학교장인 전학준 신부는 이제 빛바랜 흑백사진으로만 학교에 남아있지만 그의 교육이념은 학교에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이 학교 교장인 강경수 수녀는 "전학준 신부님은 인천 초등교육의 선구자"였다며 "전 신부님의 투철한 교육적 사명감을 이어받기 위해 전 교직원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교장은 이어 "특기를 계발하고 신장시키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종교교육을 바탕으로 한 인성교육은 박문교육을 차별화 시키며 박문초등학교를 인천초등교육의 선도자로 자리매김해주고 있다"며 이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가톨릭 정신을 토대로 학교를 설립한 분들의 교육이념이 학교 곳곳에 스며있기에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강 교장은 이와 함께 "학교 설립 초기에는 박문학교를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며 전 신부가 1906년 뮈뗄(제8대 조선교구장)주교에 보낸 편지를 소개했다. '학교에서 나온 돈은 매달 필요한 금액의 3분의 1만을 겨우 충당하고 있고 중요한 사업을 하려면 월 50원이 필요하다'며 지원을 요구하는 전 신부의 편지에서는 박문학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전 신부의 모습이 읽혀졌다. 이 학교는 현재 개교 100년의 역사를 담은 '박문 100년사' 발간을 추진중이다. 이 책은 인천의 은인이었던 전 신부를 새롭게 조명하는 또 하나의 기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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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25] 신순성 선장 손자 용석씨 지면기사
"제가 4살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아버지와 주변사람들로부터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의 함장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신용석씨는 "할아버지께서는 한일합방이 되면서 광제호 군함기를 자신의 침실에 숨겨둔채 일제 36년간을 고히 간직했었다"며 "아버지께서는 이 태그기를 1945년 해방되던 해 한국 기선취항식에서 일장기와 바꿔달라고 요구했었다"고 밝혔다. 신씨는 "할아버지께서는 한일합방 뒤에도 광제호를 잊지 못해 1917년 서울에서 지내던 가족들을 이끌고 광제호의 모항인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며 아버지와 자신이 인천사랑에 남다른 배경을 설명했다."의사로 명성을 얻었던 아버지께서 나중에는 인천의 역사를 조명하는 향토사 집필에 심혈을 기울였다"며 "이와함께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는 등 많은 일들을 이루셨다"고 밝혔다. 신태범 박사의 5남중 장남인 신씨는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가업을 물려받으라는 강요없이 자유스럽게 자식들의 뜻에 맡기는 교육을 시켰다"며 할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자율적인 교육을 시켰던 가풍이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토박이답게 신씨는 아버지에 이어 현재 지인들과 함께 인천의 향토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등 인천사랑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신씨는 현재 한국인권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조선일보 파리특파원과 사회부장, 논설위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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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35] 사숙(私塾)이란 지면기사
다소 생소한 의미의 '사숙(私塾)'은 지금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학교가 탄생하기 이전의 교육기관이다. 옛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이뤄졌던 우리의 글방은 조선말까지 존속했었다. 이 글방은 경술국치 후에도 10여년간 지속됐으나 신식 과학 문명에 각성하고 중국의 위세가 축소되면서 자연도태됐다. 이 글방을 '서당' 또는 '사숙'으로 불렀다. 성인들은 사숙에서 달마다 일정한 수업료를 내고 천자문에서 동몽선습 계몽편, 자치통감, 소삭, 사서오경을 배웠다. 따라서 사숙은 지금으로 따지면 과외나 사학의 개념과 비슷하다. 현재 서울에 있는 양정중고등학교의 시초는 사립법률대학격인 '양정의숙', 휘문도 '휘문의숙'으로 출발했다. 사숙은 학과나 학년별로 나누지 않고 선생 한 사람이 두루 가르쳤다. 따라서 얼마되지 않는 월사금을 받아 수십명의 학생들에게 골고루 학문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당시 선생의 능력은 탁월한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누추한 방에서 1년 중 3대 명절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글소리를 내게 하는 혹독한 교육 훈련으로 '선생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까지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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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끝]에필로그 지면기사
'인천 인물 100인'을 찾아 나선 지 3년이 넘어서야 그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2년을 예상했는데, 1년이나 더 끈 셈이다. 인천항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고 근·현대 시기에 이르기 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 온 100명의 인물을 선정했다. 그러나 100명의 '인천 인물'을 선정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강화를 낀 인천은 선사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유물과 역사적 인물을 배출했지만, 이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 특히 근·현대 시기의 인물사 연구는 '백지 상태'나 다름없다. 그것은 아마도 해방공간이나 6·25 전쟁 직후 좌·우 갈등이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탓에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거나 '기념'하려 하지 않았던 풍토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이름 석자나 짧은 인물 설명만을 갖고 무작정 취재에 나서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결국 연결고리를 찾지 못해 중간에 포기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시리즈 연재 기간이 길어진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매주 한 차례씩 싣기로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다보니 독자들의 불평도 있었다. "한 차례도 빠뜨리지 않고 인천인물 기사를 모으는데, 기사 게재가 들쭉날쭉해 빠뜨리는 경우가 있어 괜한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독자에겐 빠뜨렸다는 지난 신문을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서울의 한 대학생은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다른 것이 신문에 실렸는데, 어떤 게 맞냐는 식이었다. 연구자마다 시각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어서 생긴 일이었다. 그 학생에겐 취재원이었던 연구자를 연결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인천 인물 100인' 시리즈가 나가는 동안 지역의 반응도 뜨거웠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해주는 점에 고맙게 여긴다는 격려와 함께 누구 누구는 인천을 대표할 만한 사람인데 왜 아직 보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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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101]동양제철화학 창업자 송암 이회림 지면기사
"사업가는 모름지기 덕장(德將)이 되어야 한다. 지략이 좀 모자라고 용맹성이 뒤떨어지더라도 직원을 내 가족처럼 사랑하고 키워 주는 아량이 없으면 기업은 흥하지 못하는 법이다. '기업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좋은 기계로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그것을 조종하고 더 좋은 것을 만들려는 창의성 있는 인재가 없다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동양화학 이회림 명예회장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 中) 기업인이 존경받기 힘든 세상이다. 기업이 경제의 원동력이자 고용의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비자금과 분식회계, 편법 증여 등 여전히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단어들은 기업의 순기능적 이미지를 상쇄시키고 있다. 그러나 지난 7월18일 한 원로기업인이 타계했을 때 사정은 달랐다. 후배 경영인들은 물론 정·관계, 문화예술계 인사들까지 고인을 기리며 깊은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고인은 동양제철화학의 창업자인 송암(松巖) 이회림 명예회장. 향년 90세였다. 당시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한 신문에 기고한 추도사를 통해 "비록 고인은 멀리 떠났지만 선생의 정신이 우리 경제를 지탱케 하고 나아가 장래에 분단 철조망이 끊어지는 날 통일과 번영의 터전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앞서 어떤 이는 인천항과 송도를 잇는 해안도로를 그의 호를 따 '송암대로'(松巖大路)로 명명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무엇이 이처럼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그를 각인시킨걸까. 그리고 개성 출신인 그가 인천과 맺은 인연은…. #마지막 개성상인 송암은 1917년 개성시 만월동에서 태어났다. 13세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한 그는 14세에 점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신용과 근면성실, 근검절약을 중시하는 개성상인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1937년 건복상회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사업가로서의 여정에 뛰어들었다. 송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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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100]영문학자 오화섭 지면기사
인천 남동면 만수리에서 태어난 영문학자 오화섭(吳華燮·1916~79)은 미국 현대극을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번역해 알린 선구자다. 그가 번역한 미국 번역작품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비롯해 손튼 와일더의 '우리읍내', 테네시 윌리암스의 '유리동물원'과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아서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등으로 지금까지도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당시 연극인, 영문학자들은 오화섭의 번역을 두고 '번역을 창작의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평가(조선일보 1973년 10월 25일자 5면)를 했다. 1960년대 오화섭과 함께 연극평론계의 '쌍두마차'로 불린 여석기(84) 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은 지난 2005년 유영국미술문화재단과 실시한 인터뷰에서 오 교수를 '번역의 1인자'라고 표현했다. "62년에 드라마센터의 2회 공연으로 '밤으로의 긴 여로'라고 있어. 오닐의 맨 마지막 작품. 그건 참 좋은 작품입니다. 그 오화섭씨가 번역을 했는데, 오 선생이 미국의 현대연극을 번역하는 제1인자고, 참 부드럽게 번역을 잘해요." 한상철 한림대학교 교수는 1989년 열린 '오화섭교수 10주기 추모 연세극예술연구회 공연'에 앞서 발표한 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나라 서민의 일상적인 대화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분이다…(중략)…무대에서 배우가 그 대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으면 번역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중략)…짤막한 문장 길이, 적절한 어휘의 구사, 다양하고 자연스런 어미의 활용, 우리말의 리듬과 억양을 그대로 살려가는 게 오화섭 교수 번역희곡의 특징이요, 장점이다." 오화섭은 해방 이후부터 극단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을 하며 번역 대본을 무대에 올리는 데 힘썼다. 일본 유학시절 만나 결혼한, 4살 연상의 첫 번째 부인 박노경(朴魯慶)은 극단 '여인소극장'을 창단(1948년)한 한국 최초의 여류 연출가다. 당시 오화섭은 '吳說'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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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민 前인천연예협회장이 본 박경원 지면기사
"국내에서 두 개의 노래비를 갖고 있는 가수는 박경원 선배가 유일할 겁니다." 윤일민(71·사진) 전 인천연예협회 회장은 "한국전쟁 후 인천의 시대와 당시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표현한 '이별의 인천항'과 아름다운 포구에서 사는 어민들의 희망과 삶을 노래한 '만리포 사랑'을 부른 박경원 선배는 두 곡을 통해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이후 인천시와 충남 태안군은 박 선배의 노래를 기리기 위해 각각 노래비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윤 전 회장은 박경원의 노래가 당대에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쉬운 멜로디와 가사를 꼽았다. "어렵지 않은 멜로디는 연주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쉬운 가사는 일반인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죠. 대중적으로 쉽게 연주되고 부를 수 있는 노래였어요. 그만큼 노래의 메시지도 쉽게 전해졌습니다." 그는 또 "연예인, 특히 가수들이 그렇듯 박 선배도 인생 말미 힘든 삶을 살았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은 쉼 없었다"면서 "노래에 대한 애정은 후배 연예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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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99]가수 박경원 지면기사
인천 월미도 문화의거리 한 편에 서 있는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1999년 10월 9일 제막) 하단에 적힌 글(김윤식 작)은 50여 년 전 탄생한 이 노래를 이렇게 술회한다. "…100여 년 전 이 나라 최초 이민선의 노래 소리에 피눈물 뿌리던 곳이요, 8·15광복, 6·25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피붙이와 모질게 이별하던 마당이었으니 그 절절한 인간사는 두고라도 뜬구름, 푸른물, 해풍에 쓸리던 갈매기 하나인들 어찌 서러운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랴. 오늘, 비록 한 시절을 유행하다 사라진 노래이나 이 고장 인천항의 정한을 실어 세인이 부르던 곡 '이별의 인천항'을 이 비에 새겨 다시 한번 그때 그 시절의 인천을 추억해 본다." '이별의 인천항'(세고천 작사·전오승 작곡)은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4년 인천 출신의 가수 박경원(1931.4.3~2007.5.31)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본다. 당대 유행했던 곡들을 보면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삼각산 소식', '꿈에 본 내 고향' 등으로 피란민들이 잃어버린 가족과 등졌던 고향을 찾는 분위기를 그린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이별의 인천항'도 이들 노래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천의 사랑을 그린, 인천인의 노래 '이별의 인천항'이 태어난 것이다. 아울러 이 노래는 23세의 가수 박경원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박경원은 지금의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서 태어났다. 미곡상을 하던 부유한 집이었단다. 7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릴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박경원은 넉넉한 가정 환경 속에서 가수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시대 통념상 선친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박경원의 막내 동생 광원(64)씨는 "당시 예능인들을 딴따라라고 푸대접할 때였으니, 고지식하셨던 아버지의 반대가 상당히 심했다"고 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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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98] 인천언론史 지면기사
1960년 대 이래 인천 언론은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서슬퍼런 군사정권과 유신정권의 지역 언론말살 정책에 인천의 신문사들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표류하기 일쑤였다. 1960년 대 인천에는 모두 3개 일간 신문사가 있었다. 1946년 발간된 인천 최초의 일간신문인 경기매일신문(대중일보가 제호를 바꿈)을 비롯해 인천신문(1960년 창간, 현 경인일보), 경인일보(창간 연도 알려진 바 없음, 현 경인일보와 다른 신문) 등이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언론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됐다. 윤전기 도입 등을 골자로 한 시설기준공표를 발표했다. 현 경인일보와 관련 없는 이름의 '경인일보'란 신문사는 이 때 문을 닫게 됐단다. 1966년엔 경기일보란 이름의 신문이 생긴다. 인천신문에서 편집국장과 부사장을 역임한 김응태씨가 경기일보로 자리를 옮겨 폐간 때까지 편집인을 맡는다. 1969년 인천신문은 존폐 위기에 놓인다. 허합 사장이 사법 당국의 수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허합씨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인천신문은 수원으로 본사를 옮긴다. 인천신문은 수원에서 제호를 경기연합신문, 연합신문으로 잇따라 바꾼다. 당시 정권은 1973년 다시 언론말살 정책을 편다. 이름하여 '1도 1사'다. 언론인들은 1973년 8월31일을 '언론 사망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음 날 언론통폐합이 강제로 이뤄진다. 김응태씨 등 많은 언론인들이 이 때 붓을 꺾었다. 송수안씨가 경영하던 경기매일신문은 창간 27년 만에, 경기일보는 창간 7년 만에 모두 문을 닫게 된다. 연합신문과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등 3개 신문사가 통합된 것이다. 제호는 경기신문이었다. 그러다 1982년 지금의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꾼다. 오광철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은 "여러 과정을 거쳤으나 60년 창간한 인천신문은 경인지역 언론의 뿌리이며, 허합은 지금의 경인일보를 있게 한 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