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자원봉사센터에는 최근 새롭고 색다른 일거리가 생겼다. 강화 지역 영유아용 턱받이와 임산부용 손수건을 만들어 배달하는 일이다. 턱받이와 손수건은 한때 강화를 상징하기도 했던 소창으로 만든다. 재봉 봉사자들이 재봉을 맡고, 일반 봉사자들은 단추를 달아 완성한다. 강화 지역에는 대상 아이들이 7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자원봉사센터는 파악하고 있다. 이 사업은 인천시자원봉사센터 우수공모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강화군자원봉사센터에서 소창 턱받이와 손수건을 만들어 나누어 주는 것은 출산장려정책 중의 하나이다. 출산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의
경인일보가 오늘 여든한 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1945년 10월 7일 ‘대중일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경인일보는 그날 창간사에서 다짐했습니다. 국가의 성장과 함께 같이 성장하면서 오직 불편부당의 진정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만천하 독자에게 공약한다고. 일제강점기 대표적 문학 운동가였던 작가 임화는 그날 실린 축사에서 “귀 지가 우리 대중의 벗이 되기를 희망하고 또 귀 지가 이 사명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수명을 향유하시리라고 확신한다”고 격려했습니다. 여든의 나이를 산수(傘壽)라고도 합니다. 우산(傘)이 들어간 것은 아마도
인천 강화군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을 꼽으라면 단연 온수리의 금풍양조장이다. 금풍양조장에서 빚어낸 술은 그 맛도 일품이어서 1938년에는 인천주류품평회 탁주·약주 부문에서 우등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또한 양조장 건물과 여러 시설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어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금풍양조장은 강화를 대표하는 술맛을 자랑했던 만큼 1974년 정부의 양조장 통폐합 정책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1년에 설립된 금풍양조장은 빚어내는 술뿐만 아니라 곧 100주년을 맞이하는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깊은 우물
1910년 국권 피탈 당시 ‘한국병합 하사품’으로 일본에 반출됐다가 이번에 한국으로 되돌아온 ‘백석(白席) 자리’는 말로만 전해지던 ‘민무늬 교동 등메’ 연구에 결정적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시대 궁중에 진상품으로 올려졌다는 얘기만 전해지는 ‘교동 등메’를 온전한 형태로 볼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인천 강화도에서 만드는 특산 공예품이라고 하면 으레 화문석을 꼽는다. 요즘 화문석을 만드는 장인도 몇 남지 않았는데 이들 화문석 장인조차도 교동 등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궁중 진상품에
조선왕실에 진상품으로 올리던 강화 특산품 교동 등메(돗자리)가 1910년 국권 피탈 당시 ‘한일병합의 사은품’으로 일본에 반출됐다가 110년여가 지난 2026년 대한민국 인천 땅으로 되돌아왔다. 인천의 고미술수집가 A씨는 최근 한 일본인으로부터 ‘어하사조선좌(御下賜朝鮮蓙)’라고 쓰인 상자 속 무늬 없는 백석(白席) 돗자리를 구입했다. 상자에 쓰인 한자는 ‘임금에게 하사받은 조선 돗자리’라는 의미다. 조선 왕조 궁중 진상품이었다는 얘기다. 규격은 가로 178㎝, 세로 116㎝이다. 궁중 진상품 백석 돗자리는 특별히 교동에서 생산된 것
신문기자들끼리 주고받는 농담 혹은 훈계 중에서 상대에게 가장 모욕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 ‘발로 써도 그것보다는 낫겠다’는 표현이 아닐까 한다. 손으로 쓴 네 원고가 내가 발로 쓴 것보다 못하다는 얘기다. “이걸 글이라고 썼냐” 이런 뜻이다. 은근히 발을 손에 비해 하찮게 여기는 태도가 깔려 있다. 인천 출신 시인 김영승의 시에도, 선풍기의 하얀 스위치를 발로 눌러 끄다 보니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싶어 선풍기한테 정말 미안했고 괴롭기까지 했다는 내용이 있다. 배꼽을 쥐게 만드는 역발상의 시이지만, 발의 입장에서
‘종교와 관계없이 나눔을 실천할 분들은 모두 모이세요!’ 인천 강화 전등사(회주·장윤 스님)가 신도와 지역 주민이 함께하는 ‘108 자원봉사단’을 창단하고 본격 활동에 나섰다. 전등사는 6일 오전 사찰 내 역사문화교육관 대강당에서 108 자원봉사단 발대식을 가졌다. 108 자원봉사단은 공양간, 울력, 법당, 템플스테이, 화단, 사찰 안내, 다원, 어린이법회, 문화 홍보 등 9개 분야에서 봉사자를 모집했다. 모집 과정에서 기존 신도회 조직뿐만 아니라 인천대와 인하대 불교학생회, 포교사단 인천지단, 강화경찰서 불자회 등 사찰 외부 조직
강화군의 주요 섬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교동(喬桐) 역시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옛 정취를 물씬 풍기는 대룡시장과 강 건너 북녘땅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지는 화개산은 그야말로 회색빛에 갇혀 사는 도시인들에게는 색다른 맛을 안겨 주는 청량제가 아닐 수 없다. 대룡시장에 왔다가 화개산을 들르는 것인지, 화개산 모노레일을 타러 왔다가 대룡시장을 찾는 것인지,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덤인지는 중요치 않다. 고려시대 교동은 수도 개성에 사는 여유로운 이들에게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최고의 휴양지였던 모양이다. 그 시대 시인 묵객들에게
2026년은 시각장애인들에게 매우 특별하다. 시각장애인의 한글인 ‘훈맹정음’ 반포 100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 훈맹정음을 만든 송암 박두성 선생이 타계한 지도 어언 63년이다. 1888년 4월26일 인천 강화 교동면 상룡리 516번지에서 태어난 송암 박두성 선생은 1913년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발령받으면서 시각장애인들과의 인연을 맺었다. 맹학교에서 점자 교과서 필요성을 인식한 송암은 1913년 일본에서 점자 인쇄기를 들여와 한국 최초의 점자 교과서를 만들었다. 그 뒤 한글점자 만들기에 뛰어들어 많은 결함을
사냥은 산이나 들판의 짐승을 잡는 일인데, 그 사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동굴이나 무덤의 벽화 형태로 그 사냥 모습이 전한다. 인간이 처음 사냥을 시작하게 된 것은 아마도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을 테다. 어쩌면 짐승에게 쫓기던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책으로 짐승에게 역공을 가하면서 사냥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아니면 공격하는 짐승을 잡기 위해 시작된 사냥은 언제부터인가 스포츠나 놀이로 변화했다. 사냥의 여러 기법은 군인들의 전술로 발전했고, 사냥꾼은 곧바로 군인으로 징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