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배 시인
세네카는 "자살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권리이며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고상한 행위"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자살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권리라는 말에 긍정할 수밖에는 없지만 자살행위를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고상한 행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칸트는 "자살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의 위반"이라고 질타했을 것이다. 칸트의 말은 백번 옳은 것이다. 신은 한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낼 때 감당해야할 의무와 역할을 주어 보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하는 의무와 역할,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의무와 역할,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의무와 역할,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역할이 있는 것이다. 자살은 이 모든 의무와 역할을 포기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들은 국민적인 사랑을 받던 여배우 최진실 씨가 자살한 사건을 보며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을 겪었다. 당대 최고의 스타 고 최진실씨의 화려한 성공 스토리 뒤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외로움과 서러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어린 자식 둘을 두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녀의 존재 의미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악플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우리들은 그 죽음을 더욱 가슴 아파했고 슬퍼했고 분노했다.

악플 때문에 자살한 연예인은 고 최진실 씨 뿐만은 아니었다. 고 유니 양과 고 정다빈 양의 자살 또한 악플 때문이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연예인들은 대중의 우상이다. 연예인은 젊은이들의 동일시의 대상이며 연예인을 통해 열광하고 대리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팬클럽이 결성되기도 하고 라이벌 관계에 있는 연예인의 안티팬이 되기도 한다.

안티팬 중에 감당하기 어려운 악플을 올려서 해당 연예인에게 상처를 주고 이 상처가 우울증이라는 치료되기 힘든 병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연예인들이 악플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악플은 익명성의 보장으로부터 악성바이러스처럼 번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악플 때문에 또 어떤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팬과 국민들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들지 모른다. 악플의 폐해와 심각성을 뒤늦게나마 인식하게 된 것은 고 최진실 씨의 죽음이었다.

악플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인터넷 실명제를 법령으로 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면서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인터넷 실명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측이 여당이었고 실명제는 사이버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라고 반대하는 측이 야당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할 문제이지 당리당략으로 접근해서는 안될 문제이다.

인터넷 실명제를 찬성하는 측의 주장은 익명표현의 자유는 필요한 경우 제한이 가능한 상대적 기본권이며 익명의 표현으로 발생하는 상대방의 인격권, 명예, 사생활 등이 심각하게 침해되는 경우가 있다면 기본권 간의 충돌로 이는 비교형량을 통해 제한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실명제를 반대하는 측의 주장은 익명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 언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바 실명으로 글을 쓰게 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표현이 자유스러워 질 수 없으며 이는 일종의 사전 검열로 기본권으로서의 익명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신성하게 여긴다면 이 신성한 권리를 타인을 비방하고 욕하고 매도하는 일에 써서는 안될 것이다. 나의 표현권이 소중하다면 타인의 인격과 행복권도 소중한 것이라는 상호 주관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악플을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익명성 뒤에 숨어서 악의적인 표현으로 타인을 죽음으로 몰거나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어 행복추구권을 훼손한다면 이처럼 저열하고 비겁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익명 표현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한되더라도 인터넷 실명제는 실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적 약자라 하더라도, 그리고 소수자라 하더라도 이제는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실명으로 밝힐 수 있는 성숙한 민주사회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