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 사진
처인성. /대지중 제공

'부곡' 하층민·1만 병사, 10만 정예군 물리쳐
고려조정, 훗날 공로 인정 '처인현'으로 승격


행정구역의 명칭은 어원, 지리적 특성, 역사적 배경, 문화적 배경, 전설 등을 참고로 정합니다. 용인시 처인구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을 명칭이 지어진 것입니다. 처인구라는 명칭은 한때 세계 최강의 국가이자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몽골의 침입에 맞서 승리를 거둔 처인성에서의 승리를 기리자는 취지에서 붙여졌습니다.

처인성은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고려 시대 토성입니다. 성은 주로 방어용으로 쌓은 건축물로, 나무를 깎아 세워 만든 목책성, 흙을 다져 만든 토성, 돌로 쌓은 석축성, 벽돌로 쌓은 전축성 등으로 나뉩니다. 처인성은 토성에 해당합니다.

고려 시대에 처인부곡에 쌓아진 토성은 당시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둘레 425m의 비교적 작은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훼손된 부분까지 합쳐도 겨우 250m 정도의 길이만 남아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외침을 많이 받았던 시대입니다. 특히 13세기 들어 칭기즈칸의 주도 아래 세력을 키운 몽골은 금을 멸망시키고 고려까지 침략해옵니다.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이후 고려는 몽골과의 항쟁을 목적으로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고려의 강화 천도를 문제 삼은 몽골군은 2차 침입을 감행합니다. 이때 몽골의 10만 대군을 이끌던 총대장인 살리타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던 장군입니다.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의 주력부대가 광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말머리를 돌려 처인성을 공격해 내려오게 됩니다.

10만의 몽골 정예군을 맞아 싸운 것은 훈련이 거의 되지 않은 처인 부곡민과 1만여 명의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군은 당황하지 않고 몽골군을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오게 한 후 화살 한 방으로 살리타를 사살했습니다. 지휘자를 잃은 몽골군은 참패를 당하고 물러났습니다.

결국, 처인성 싸움에서 큰 승리로 몽골의 2차 침입을 물리치게 된 것입니다.

이때 화살을 쏘아 살리타를 제거한 사람이 승려 출신의 김윤후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김윤후에게 무인 중에서는 가장 높은 상장군이라는 직위를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윤후는 이를 사양하고 그보다 훨씬 낮은 섭낭장직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김윤후의 높은 인품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처인 부곡민들이었습니다. 처인부곡에서 '부곡'이란 용어는 고려의 특수 행정 구역인 향·부곡·소 중 하나로 일반 백성들보다 차별대우를 받던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의 명칭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국가로부터 차별을 받아왔던 처인 부곡민들은 국난 극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처인 부곡민들의 이런 정신과 공을 높이 사서 처인현으로 승격했습니다.

짬이 날 때 이곳에 들러 절박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국난 극복에 앞장선 선열들을 떠올리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우장문 대지중 수석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