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초등학교 1
정재초등학교 전경. /원일중 제공

안산지역 문신 '정재 유명현' 고향집
손자 물려받아 사교장 '오교장' 지어
가풍 이어받은 후손 독립운동가 활동


안산시 부곡동 42번 국도변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정재초등학교. 학교 이름은 대체로 해당 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지역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교육적으로 큰 뜻을 품으라는 일반적 의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지만 정재초등학교는 조선시대 안산에 세거한 대표적인 문벌집안 진주류씨가문에 유명현의 호(정재)를 학교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유명현은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으로 1673년(현종 14)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한 해 전 1672년(현종 13)에는 그의 형들인 유명견, 유명천이 모두 과거에 합격했기 때문에 삼형제 모두 연이어 과거에 합격하면서 집안을 빛내 주위의 부러움을 받았습니다. 유명현은 이후 여러 중요 부서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1678년(숙종 4) 전라도관찰사가 됐습니다.

한편 이 시기는 급격한 정치 변동을 겪던 숙종의 환국 시대였기 때문에 유명현의 집안도 이 회오리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1680년(숙종 6)에 모든 관직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1689년(숙종 15) 새롭게 정치 환경이 바뀌어 관직에 복귀해 승지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또 한번의 광풍이 불어 1694년(숙종 20) 흑산도에 유배됐다가 1699년(숙종 25)에 이르러서야 겨우 안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돌아온 후에도 이러한 정치 환경은 변하지 않아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를 해치려 했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남해도에 유배를 가서 안치됐다가 결국 유배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후손들에 의해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묘소를 안장하게 됐습니다.

세월이 흘러 손자 되는 유경종은 할아버지 유명현의 고향집을 물려받아 오교장이라는 넓은 땅을 마련해 현재의 부곡동에 안산지역은 물론 여러 지역에서 유씨 집안을 찾아오는 양반들에게 사랑방을 제공했습니다. 당시 오교장에 드나들었던 인물들은 영의정 채제공,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 등 여러 분야의 뛰어난 분들로 이곳에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어 서로 나누는 등 학문과 사교의 공간으로 이용됐습니다.

한편 유명현의 7세손 되는 유익수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안산 최대규모의 비석거리 만세운동을 주도하신 분입니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을 이어받은 후손들은 사회를 위해 큰 결정을 하게 됐습니다.

1967년 3월 후손들은 상록구 부곡동에 선조 유명현이 살았던 오교장의 부지 3천500평을 정부에 기부했습니다. 그 땅은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공간으로 활용돼 그 해 10월 안산국민학교 부곡분교장으로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68년 1월 4일 안산국민학교 부곡분교로 인가를 받았고, 이후 학교 공사를 마치고 1971년 3월 1일 정재초등학교 인가를 받아 1971년 3월 26일 정식으로 개교했습니다. 지역에서 후손들의 높은 뜻을 살려 유명현의 호를 학교이름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찾기 어려우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대광 원일중 수석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