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룬 국민들 스스로가
높은 민주주의 의식 가졌더라면
아직도 진행중인 촛불집회라는
거대한 사회적 비용 필요치 않아
이제 자격 갖춘 시민으로 성장
거대한 시험대를 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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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사람들이 서로 다투다 보면 "당신이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냐?"고 묻는다. 그 말은 상대에 대해 이미 권위나 영향력의 우열이 무너진 경우에 드러난다. 국가 '지도자의 자격'이 극적으로 실추된 상황에서 '국민의 자격'은 우리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에 신뢰할만한지 묻고 싶다.

흔히 '부모의 자격'은 운위되지만 '자식의 자격'은 없는 것처럼, '지도자의 자격'은 거론되지만 '국민의 자격'을 논하지는 않는다. '자식의 자격'은 가부장주의적 억압을, '국민의 자격'은 국민국가의 비민주적 동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시대처럼 지배 규범이 없이 서로 다른 윤리적 규범들이 상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헌법에는 지도자의 소명이자 자격의 예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대해 청렴의 의무,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직무수행, 국가의 독립이나 헌법을 수호할 책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 등이 적시되어 있지만, 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이를 실행하지 않더라도 제재를 받지 않는 윤리적 혹은 정치적 자격들이다. 이와 달리 '국민의 자격'은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제외하면 따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선거권과 공무담임권을 가진 국민들이 그 권한을 수행하기 위하여 공화주의적 자격과 능력을 스스로 갖추고 고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다.

혹자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집단지성이 민주주의를 이루어 나간다고 믿는다. 노조나 정당 등이 이른바 '민주시민교육'의 이름 아래 시민들에게 민주적 규범과 가치를 심어주고 그 기반 위에서 민주주의라는 불안정한 체제가 자리잡도록 한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보수언론인이 일정한 역사관, 국가관, 대북관을 공유해야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지닌다고 주장할 때에 우리는 그 이념적 배후를 의심한다. 평화주의적인 종교인이 9·11테러에 대한 보복적 성전에 동의하는 미국인들을 세계를 이끄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비판하는 모습에서 과도한 보편적 이념주의를 발견한다.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국민의 자격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비폭력 평화혁명 촛불집회에서 광장의 시민으로서 그 형체를 드러낸다. 시민들의 동원된 힘은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대통령을 탄핵하고 구속하게 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기사회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적 자긍심과 해외 언론의 상찬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정치는 부패한 국회의원을 선출했기 때문이요, 부패한 국회의원을 선출한 것은 부패한 국민인 까닭이다"라는 영국의 격언이 여전히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들은 누차에 걸쳐 대통령권력의 타락을 미리 예단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눈감고 귀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자정적 제도화를 이루지 못했었다. 이제 대통령과 그 주변의 부패한 정치모리배들을 몰아낸 것만으로 과연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까? 한반도 안보위기가 극한적으로 치닫고 있지만, 대통령 후보자들은 그 어떤 해결책이나 제안조차 해볼 수 없는 이 상황이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결여된 그들만의 탓으로 돌리기는 쉽지 않다. 자격있는 국민의 부재를 빗댈 수 있는 괴테의 말이 우리와는 무관하기를 희망한다. "다수라는 것보다 분개하게 하는 것은 없다. 다수를 구성하는 것은 소수의 유력한 선구자 외에는 대세에 순응하는 건달과 동화된 약자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따라 붙는 대중들이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이룬 국민들이 스스로의 높은 민주주의 의식을 항상 곧추세우고 있었더라면 무려 22차에 걸쳐 1천500만 이상을 동원하면서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촛불집회라는 거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괴벨스라면 "이것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라고 조소하고, 히틀러라면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권력자에게는 얼마나 큰 행운인가?"라고 흐뭇해하지 않았을까?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지켜오고 있는 동안 민주주의적 교양을 갖춘 자격있는 시민으로 성장했고, 이제 다시 거대한 시험대를 응시하고 있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아니라도 더 추한 정치지도자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가?

/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