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업사지 5층탑과 당간지주
봉업사지 5층탑과 당간지주. /효명고 제공

안성 죽산면 '교통의 요지'에 사찰 창건
'업적을 받든다' 뜻 태조 초상화 안치도
고려쇠락에 폐허로… 5층탑 등만 남아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죽주산성 주변에는 불교 관련 유적과 유물이 많이 분포돼 있다. 이곳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 주목받던 곳이었다. 특히 고려시대에 지방 통제의 거점으로 중시된 곳이었다. 원주의 세달사에서 수행하던 궁예가 세상에 대한 뜻을 품고 처음으로 찾은 곳이 죽주(竹州)였다.

죽주(竹州)는 지금의 안성시 죽산면, 일죽면 일대와 용인시 백암면의 일부로 추정되고 있다. 891년 궁예는 초적 출신으로 죽주에 웅거하고 있었던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기훤이 죽주에 자리잡은 것이나, 원주에서 출발한 궁예가 죽주로 온 것은 이곳이 갖는 지리적 요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죽주는 동으로는 충주 방면, 서쪽으로는 평택, 남으로는 청주, 북으로는 서울 방향으로 연결되는 등 동서와 남북 교통의 요지에 해당된다. 이 때문에 백제나 고구려가 남쪽으로 진출할 때나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때 죽산은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

기훤이 죽주에 자리 잡기 전에 경주에서 지방관으로 파견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박적오(朴赤烏)의 후손들은 죽주 박씨가 돼 이 지역의 세력가 집안으로 성장했다. 944년의 한 기록에 죽주의 박기오(朴奇悟)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훤 세력은 900년 궁예에 의해 평정됐던 데 반해 죽주 박씨는 계속 세력을 유지해 죽주의 대표적인 집안이 됐던 것이다. 죽산의 대표적 호족인 죽산 박씨가 왕건의 지방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결과, 통일신라 때 개산군(介山郡)이었던 지명도 고려 초에 죽주로 바뀌었다.

고려 초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청주 지역의 호족에 대한 통제나 후백제와의 전투를 지원하기 위한 거점으로 죽주가 중시됐다. 죽주는 남한강과 금강 상류를 연결하는 관문이 됐기 때문이다.

이렇듯 죽주가 고려 정부의 이익을 대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미 신라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화차사'라는 절이 있었던 자리에 새롭게 '봉업사(奉業寺)'가 창건됐다. '업적[業]을 받든다[奉]'는 의미를 담고 있어 창건부터 왕실과 관계가 밀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봉업사는 광종 14년(963)에 대대적으로 중창됐다. 사찰의 규모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태조의 진영(초상화)을 모시는 진전사원의 위상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망이산성이 대대적으로 수축됐다. 망이산성은 진천, 음성, 죽산, 이천 등의 주변 지역뿐만 아니라 충주, 청주 지역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곳이다.

광종은 개국공신과 호족 세력을 숙청하면서 봉업사를 확대하는 동시에 망이산성을 수축해 중앙 집권 및 왕권의 강화를 꾀했다. 즉 죽주를 거점으로 삼아 충청 내륙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조치였던 것이다.

봉업사지 주변에는 매산리사지, 장명사지, 죽산리사지가 있다. 매산리사지탑지석이 성종 12년(993), 장명사지탑지석이 경종 2년(977)에 제작됐고, 죽산리사지는 건립 연대를 추정할 만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앞의 두 곳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사찰들은 봉업사와 일정한 관계 속에서 창건됐을 것이며, 고려 왕실이 계속해 죽주 지역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피난 갔던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가면서 봉업사에서 태조의 진영을 알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말기까지 봉업사가 진전사원으로서의 위상이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봉업사지에는 6m 높이의 5층탑과 당간지주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중요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창건된 봉업사는 고려의 쇠퇴와 더불어 그 의미를 상실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미 폐허가 됐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 그 폐허 위는 농경지로 바뀌어서 사람들의 기억조차 덮어가고 있다.

/장연환 효명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