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개인·독립의 개체…'
두 주장 틀렸다고 탓하기보다
우리사회 어떤 결핍 보았는지
동의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야

저자인 이철승 교수는 세대의 정치가 어떻게 불평등의 구조를 낳게 되었는가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그는 386세대의 '네트워크 위계'가 '한국형 위계 구조'로 진화했다고 본다. 여기에서 위계구조는 첫째, 나이에 기반한 '연공구조'를 한편으로 하고 둘째, 세계화로 인한 노동시장 유연화 기제, 대·중·소기업 간 지배종속 관계, 그리고 노동조합을 통해 3중으로 중첩된다. 이 우연적 결합의 중심에 386세대의 네트워크가 최대의 수혜자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들은 이른바 민주주의연대를 매개로 자본주의 하의 시민사회를 처음으로 조직한 세대였다. 또한 그들은 이전 산업화세대가 퇴출된 공간을 차지하고 후세대의 편입을 선별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과대대표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으로 과대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약속했던 민주주의의 확장을 저버렸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반일종족주의'란 책은 역사학과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사회운동권에 두루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인문학 도서로는 보기 드물게 1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 한다. 독자들은 자신의 역사관이나 정치관에 따라 격분하기도 하고, 합리적 정당화의 지적 자원을 찾았다고 득의만만하기도 한다.
이영훈 교수 등의 주장도 기존 역사학계의 통념을 뿌리째 흔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년기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성장한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정서와 충돌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분노를 드러내며 친일파 혹은 '토착왜구' 등으로 먼저 낙인찍는다.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수탈을 시장적 교환으로 해석하고, 강제노동과 민족간 임금차별, 그리고 강제징병을 부정하고, 한일회담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청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민족 민족주의의 상징인 백두산과 독도 문제의 뿌리 얕은 내막을 드러내고, 쇠말뚝신화의 허구성을 밝히며, 구총독부 청사의 해체를 반달리즘식 문화테러로 보기도 한다. 고종을 망국의 암주가 아닌 개명군주로 둔갑시키는 정치적, 역사적 '조작'에 맞서서 백성과 국민에 무책임한 이 나라 지배층과 엘리트들을 성토한다. 위안부와 공창제 문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 그대로다.
나는 위의 두 책의 주장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동의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연구에 대해서 '동의'에서 나아가 '환호'하는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이철승 교수는 시장의 근본적 모순인 자본과 노동 간의 근본적 해결을 주장하는 구조주의 좌파에 맞서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계급의 덫에 빠져서 실제의 사회적 지배와 신분제에 눈감고 이를 존속시키는 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시장경쟁의 폭압에 국가가 개입해 사회와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속박을 공히 부정한다. 이영훈 교수는 샤머니즘적 반일종족주의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와 근대화된 세계주의를 열고자 한다. 반일종족주의의 기형적 산물인 북한의 신정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전근대적 권위주의가 어떻게 근대적 민주주의의 확산과 심화를 억누르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이철승 교수는 "신분제 사회를 해체하고 내 자식과 다른 자식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사회적 위험을 분담하며, 노동의 대가를 적절히 공유하는 사회"를 꿈꾸고 있다. 이영훈 교수는 "자유로운 개인, 독립하는 개체, 충일한 개성, 고양하는 예술, 과학하는 정신, 협력하는 사회, 경쟁하는 기업, 세계와 통상하는 나라, 그러한 아름다움… 근대문명", 즉 자유로운 개인의 근대국가를 꿈꾼다.
진단이 틀렸으니 처방인들 맞겠는가 탓하기보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결핍을 보았는가, 그리고 그들의 독자인 시민들이 또한 그러한 진단에 동의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만하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