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 민주주의 뿌리째 병들어
네트워크로 권력장악 성공한다면
사회적 문제해결도 포퓰리즘 변질
정치적 감응력 갖춘 시민 필요할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근원적으로 착근하기 어렵지만, 현존 민주주의 역시 불협화음을 내면서 정치적 효능감을 감쇠시킨다. 이제 진보적(?) 민주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공공연히 그 내부로부터 나온다. 현 집권세력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진중권은 촛불정권이 연성독재로 전락했다고 질타한다. 진보좌파개혁세력과 정부에 몸담았던 한상진은 그들의 국가권력중심주의를 지적하고, 최장집은 인민민주주의적인 전체주의의 도래를 우려한다. 보수적 우파들의 견해를 차치하더라도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위기와 파국에 다가가고 있는 듯 보인다.
영국의 정치학자인 데이비드 런시먼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종말을 고하는가?'라는 책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등 세 가지의 계기로 온다고 분석하고 있다. 첫 번째 징후는 쿠데타이다. 쿠데타의 원인으로는 이념적 좌우대립, 국가 기구 간의 분열, 정치적 파벌 간의 불신, 국책책임자의 부재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충분히 무르익은 나라에서도 군사적 쿠데타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현대의 쿠데타는 조용하게 다가올 뿐이다. 집권 세력들이 민주주의를 유예하는 행정부 쿠데타나 전략적 선거조작 혹은 부정투표 등이 있을 수 있다.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세력들이 공약을 내세워 민주주의를 장악하기도 한다. 이러한 조용한 쿠데타를 수행하기에 민주주의의 절차는 썩 괜찮은 외양이 되기도 한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를 지지하던 것이 오히려 가장 큰 위협이 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것이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방어벽이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또 다른 계기는 핵전쟁이나 환경재앙 그리고 나치즘과 같은 대재앙의 위기로서 실존적 위협이기도 하다. 물론, 대참사가 낳는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어날지 모르는 최악의 사태를 걱정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실존적 위험 앞에서 생명과 제도가 저울질 될 때 민주주의는 소모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이론가 일레인 스캐리는 "우리는 핵무기를 철폐하는 대신 의회와 시민을 제거해 버렸다"고 말한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 대한 공포 속에서 우리들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가 위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정보권력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컴퓨터가 인간의 반응을 유도해 내는 능력이 오용되면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편향을 조장하고자 특정 성향의 유권자들을 겨냥해서 기계가 메시지를 보내고 가짜 뉴스를 만들어 간다면 민주주의는 뿌리째 병들게 된다. 민주국가의 힘은 상의하달식 권위와 폭넓은 포용성의 적절한 결합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이 권위만을 내세워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와 포털 그리고 SNS와 같은 네트워크에 기반한 정보권력 리바이어던을 수하로 부리게 된다면 민주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민주주의란 애초에 오랜 시간을 숙고하면서 의사결정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국가 혹은 정치권력이 더 많은 정보와 지배적 지위를 가지고 조정하면서 확증 편향에 물들은 군중의 '다수의 횡포'를 민주정치의 양념이라고 호도한다면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없다. 네트워크의 힘으로 사회운동에 성공할 수는 있지만 권력 장악에도 성공한다면 사회적 문제 해결도 포퓰리즘으로 흐르고 민주주의도 점차 쇠약해진다.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이고 적극적이면서 성찰적인 시민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위기징후를 포착할 수 있는 정치적 감응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문제 해결에 무능하더라도, 당면한 사회적 문제 해결이나 진영적 독선을 위해 민주주의를 버리는 우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야말로 실존적 죽음을 부르는 사회적 공포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