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기억은 애쓰지 않아도 자석처럼 육체와 정신에 오래 들러붙는 게 있다. 내게는 20대 시절 병영생활이 그런 기억 중 하나다. 복무 중 유쾌했거나 반대로 힘들었던 기억의 편린들이 이따금 떠올라 안부를 전한다. 생활관에서 뒤엉켜 지내던 이들과의 기억도 그렇다. 큰 사건 없이 보냈을망정, 그렇다고 감추고 싶은 괴로운 일들이 없을까. 비슷한 경로를 지나온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설령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을지라도 주위에서 접한 씁쓸한 군대 이야기는 다른 단체 생활에서 겪은 고충을 끄집어내기 충분한 소재인 듯하다.
지난달 20일 평택의 한 해군 부대 생활관에서 한 병사가 다른 부대원들을 향해 흉기를 꺼내들고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화로운 일요일 저녁 부대원들이 취침을 앞둔 시간이었다. 다른 대원들이 흉기를 든 병사를 제지하면서 다행히 큰 상해 피해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당시 상황을 목격한 이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그 여파가 남아 일부는 여전히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사건이 보도되자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내용의 반응부터 자신이 군 생활 때 겪었던 부조리와 아찔했던 경험들을 증언하는 등 각양각색의 댓글이 이어졌다. 제보를 접하고 취재하는 동안 나 역시 과거 기억들을 떠올리며, 더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 발생에 적잖이 머리가 복잡해졌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흉기 사건을 막을 몇 번의 징후가 있었음에도 부대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점이다. 사건 발생 전 생활관 내에서 유사한 소동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내부 증언을 토대로 부대 관계자에게 이에 대해 몇 차례 물었으나 반복해 돌아온 것은 “보고되거나 확인된 게 없다”는 답이었다.
그러나 이후 해군은 후속 보도가 이어지자 입장을 번복했다. 사건 발생 이틀 후 부대원들을 상대로 뒤늦은 자체 조사를 진행해 가해 병사가 과거 몇 차례 유사 소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그동안 분리 등 조치는 없었고, 동료들은 불길한 예감을 안고 몇날 며칠을 같은 생활관에서 마음 졸여야 했다. 종합하면 이번 사건은 군 당국의 허술한 병사 관리 체계가 생활관 내부를 문드러지게 방치한 결과나 다름없다.
이제 군 당국이 나설 차례다. 책임자 문책을 넘어 진상조사를 통해 이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복무규정과 부대 점검 체계의 빈틈을 메워야 한다. 사건 후 트라우마를 겪는 피해 병사들에 대한 심리 치료 등의 지원과 별개로 가해 병사가 이 같은 행동에 이르게 된 경위를 되짚는 것도 중요하다.
국방부 부대관리 훈령은 자해 및 타해의 심각한 위협이 있다고 판단될 시 절차에 따라 분리·입원 등 조치하도록 규정한다. 아울러 위험 징후가 있는 병사들에 대해서는 전문가 상담·심리검사·병역심사관리대 입소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사건 발생 조짐이 있었음에도 이런 규정에 입각한 관리가 이뤄지지 않은 점에 대해 면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하며 점검 대상은 특정 부대가 아닌 전 부대 상대로 폭넓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번 사건과 유사한 일, 나아가 더 큰 비극의 발생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새파란 청년들의 기억을 국가가 강제로 저당잡은 만큼, 이들의 기억과 신체를 보호할 시스템 마련도 국가의 몫이다. 군 당국의 책임 있는 대응을 기대한다.
/조수현 사회부 기자 joeloac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