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항쟁의 기록 ‘소년이 온다’

거대 서사속 詩에 근접하는 문장

기억의 윤리학 앞에 숭고한 맥박

숱한 죽음과 헌신을 기억하면서

지금도 힘겨운 민주주의 길위에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며칠 전 ‘5·18민주화운동’이 45주년을 맞았다.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이가 벌써 정년을 코앞에 두고 있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이날을 상징하는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되는 특유의 비장미를 가진 노래이다. 추모행사 때마다 어느 참석자가 부르느니 안 부르느니 하는 화제를 언제나 몰고 오는 그런 상징적 서사가 담긴 노래이다. 그러다가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가 또 하나의 상징으로 얹혀 이제 5·18은 두 개의 예술적 기둥을 안게 되었다. 앞으로는 행사 때마다 이 운문과 산문, 노래와 소설이 결속하고 합주되면서 이날의 크나큰 비극과 위엄을 증언해갈 것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열흘간 벌어진 학살과 항쟁의 기록을 담고 있다. 한강은 이 소설에서 끔찍하게 죽어간 망자들을 불러내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가장 절박하고 내밀한 언어를 부여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5월 광주’를 겪은 이들이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가장 위대한 항쟁의 주역이었음을 세상에 고통스럽게 알린다. 그런데 이러한 거대 서사를 수습하면서도 한강의 문장은 종종 ‘시’에 근접해간다. 굵직한 서사의 뒤안길로 서정적 침잠을 낳는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는 특유의 한강 브랜드로 이름이 높다. 아닌 게 아니라 노벨문학상 선정이유서에서도 그의 소설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었다고 평가되었다. 사실 ‘역사’와 ‘시적 산문’은 조화롭게 결합하기 힘들고 심지어 상호 충돌하는 기율이다. 그러나 그의 문장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오고, 역사 현장과 그 너머 소리가 동시에 울려오며, 고통과 위안, 폭력과 치유가 함께 적정한 표현을 얻는다. 작가는 그날의 폭력에 맞선 깨끗한 양심들이 이날을 ‘사태’가 아니라 ‘항쟁’의 날로 기억하게끔 해주었다고 고백한다. 한강이 형상화한 기억의 윤리학 앞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느끼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 시대를 살아간 많은 이들의 내면에는 어둑한 충격과 빛나는 저항의 기억이 동시에 아로새겨졌다. 이 소설이 인간의 존엄성을 증언하는 순간을 보여준 ‘빛’의 언어였음을 우리는 그가 노벨문학상 시상식에서 밝힌 은유 한 대목에서 발견하게 된다. 수상 강연은 ‘빛과 실’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작가는 최근 우연히 초등학교 시절에 쓴 일기장을 발견하였는데, 뒤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한강’이라는 이름이 쓰였고 내지에는 시 여덟 편이 연필로 쓰여 있었다고 하였다. 4월 어느 날짜가 적힌 시 한 편에는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사랑이란 무얼까?/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라고 쓰여 있었는데, ‘소녀 한강’의 언어가 은은하게 우리에게 건너온 것이었다. 그 순간 작가는 가슴과 가슴을 이어준 금실이 자신의 글쓰기를 지탱해왔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 질문이란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혹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같은 아이러니를 한결같이 품고 있다. 작가는 그것을 가능케 해준 것이 우리를 이어준 ‘실’이었고, 그것이 바로 ‘언어’임을 강조하였다. 생명의 ‘빛’이 흐르는 ‘실’에 고통스러운 질문들이 끊임없이 접속하던 글쓰기의 순간을 온몸의 기억으로 소환한 것이다.

결국 ‘소년이 온다’는 소년 ‘동호’가 목격하고 함께한 죽음들, 새 한 마리의 비상처럼 혼으로 떠나간 사람들, 잔인성의 극점을 보여준 사람들, 그날 이후의 숱한 고통을 울음 속으로 간직해온 사람들을 통해 그날을 입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렇게 ‘5월 광주’는 인간의 잔혹함과 위대함을 엇갈리게 보여주면서, 한강의 고통스러운 언어처럼, 숱한 죽음과 헌신을 기억하면서, 계엄과 내란을 넘어, 지금도 힘겨운 민주주의의 길을 가고 있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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