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혜연 사회부 기자
유혜연 사회부 기자

고백건대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엘리트’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명문대 졸업장도, 특별한 연줄도 없었다. 오직 공정한 시험을 거쳐 기자가 됐고 그 과정을 통해 내 능력을 증명했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여성주의’도 자연스레 나의 성취와 맞닿은 언어처럼 여겨졌다. 제도 안에서 증명된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곧 정의라고 여겼다.

그 믿음은 파주시 용주골에서 무너졌다. 지난해 성매매 집결지 현장을 취재하던 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들고 교정하러 온 사람이었다. “당신들도 결국 구조돼야 하잖아요.” 순진한 반문은 이내 현장 활동가와의 언쟁으로 번졌고, 사과를 요구받았다. 당황했지만 곧 알게 됐다. 이들을 취재하겠다고 하면서도 이미 ‘피해자’라는 낙인을 먼저 씌우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사과는 단지 단어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언론이 이들의 언어와 맥락을 지우려 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저항이었다. 누구는 보호를 원하지만, 누구는 시혜적 시선을 거부하며 ‘성노동자’라는 이름을 택했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런 상이한 현실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피해자’가 아닌 ‘노동자’로 자신을 지칭하는 여성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윤리와 공공성의 질문을 던졌다.

세상이 이토록 복잡한데도 행정은 여전히 그 다층성을 하나의 언어로만 교정하려 들고 있다. 최근 파주시장은 기사에 사용된 ‘성노동자’라는 표현이 법적 정의에 어긋난다며 ‘성매매피해자’로 정정하라고 요구해왔다. 칼럼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정한 단어를 지우고 ‘올바르게’ 고쳐 쓰라는 이 방식은 독자의 시야까지 교정하고자 하는 의지로도 읽힌다.

표현의 자유는 물리적 억압에 의해서만 훼손되지 않는다. 공공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교정 역시 언론에 대한 깊은 개입이 될 수 있다. 1931년 미국 대법원은 ‘Near v. Minnesota’ 판결에서 신문 발행을 사전에 금지한 조치를 위헌이라 판단하며 언론 검열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최근 경기도의회 양우식 의원의 ‘언론 바로잡기’ 발언도 공공자금을 앞세운 검열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파주시장의 정정 요구는 더 교묘한 방식으로 저널리즘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불편한’ 단어를 지우려는 개입은 특정한 여성상만을 상정하는 행정의 시선을 드러낸다. 파주시가 내세운 ‘여성친화도시’는 과연 어떤 여성을 위한 것인가. 정상성을 전제로 한 ‘올바른 여성’을 위한 정책이라면 그것은 엘리트 여성주의의 외피를 두른 행정 편의일 수 있다.

밝히건대 나는 성매매 합법화를 지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논리 아래 누군가의 몸이 거래되는 구조는 비윤리적이라 믿고, 대리모 산업도 같은 이유로 반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념일 뿐 그 기준으로 취재 대상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불편한 언어일지라도 그것이 소수자의 삶을 증명하는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노동자’라는 표현은 그런 맥락에서 보도한 것이다.

표현은 곧 관점이고 언어는 존재를 증명하는 최소한의 방식이다. 언론의 일은 누군가의 존재를 설명하는 언어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그 들리지 않던 말들의 자리에 공공이 서슴없이 검열의 손길을 들이대는 일. 그것이야말로 저널리즘에 대한 모독이다. 여기에도 또 빨간 펜을 들이밀 것인가.

/유혜연 사회부 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