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으로 민족계몽 흔적… 교과서 빼앗겨도 ‘독립 기틀’
수원 화성 외곽 삼일중·삼일고·삼일상고
1903년 독립운동가 설립 삼일학당서 시작
일제강점기 탄압 받으면서도 수업 이어가
1923년 미국 교회 지원 ‘아담스기념관’ 건립
비밀 결사 단체 활동공간 사용 상징적 장소
설립자 임면수 선생, 국채보상운동 등 헌신
수원 화성 외곽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조국 독립을 향한 열망이 고스란히 담긴 학교들이 나란히 있다. 삼일중학교·삼일고등학교·삼일상업고등학교 3곳이 바로 그 곳이다. 이곳에 항일의 역사와 수원의 근대사가 온전히 자리잡은 아담스기념관이 있다. 구한말 경성학당부터 시작해 삼일학교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항일과 독립의 기억을 담고 있는 건축물과 민족계몽에 힘쓴 독립운동가의 일생을 통해 항일의 흔적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 수원지역 민족운동의 중심 ‘삼일학교’

삼일학교의 시작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5월 수원시 보시동(현 북수동) 북감리교회에서 삼일학당이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재양성과 근대화 준비를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판단한 수원지역 독립운동가와 유지들 7명이 뜻을 모아 학당을 설립했다. 삼일학당은 자그마한 초가집 교회에서 남학생 11명과 여학생 3명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학당 설립에 나선 이들은 학교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주저하지 않고 투입했다. 어려움도 있었다. 지역민들이 한문 글방으로 자녀들을 보냈고, 삼일학당은 양학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외면한 것이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삼일학당은 신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일부 지역민과 독립운동가의 자녀들을 위주로 교육을 이어갔다.

삼일학당은 1910년대 일본의 국권침탈 이후 삼일소학교가 됐다. 학교는 일제 침략에 대항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영어와 산술 등의 교육을 중점적으로 진행했다. 일본 헌병대와 맞서 싸울 경우에 대비해 체육 수업에는 학생들에게 목총을 쥐어주는 등 독립운동의 기틀을 쌓아갔다.
3·1 운동 이후에는 학교 이름 때문에 일제의 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일제는 삼일소학교의 ‘삼일’이라는 이름을 문제 삼았다. 학교는 ‘삼일’이라는 학교명은 단순히 기독교 교리의 삼위일체를 뜻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일본 헌병대의 탄압은 심화됐다.
학교는 일제에 교과서를 모두 뺏기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이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은 직접 만든 교과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교과서 없이 수업을 해야만 하는 상황도 있었다. 또 교사들을 따로 불러내 학교를 폐교하라고 협박했고, 교사들이 출근하지 못하도록 막기도 했다.
■ 아담스기념관

이렇게 탄압 가운데 놓여있던 삼일학교에도 발전의 계기는 찾아왔다. 1923년 수원 매향동에 새로운 근대식 교사(校舍)를 지어 독립한 것이다. 당시 미국 북감리회 소속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윌리엄 노블(W. Noble) 목사는 교회 건물에 얹혀 운영되는 삼일학교의 소식을 자신의 고향 교회인 미국 매사추세츠 노스 아담스교회에 알렸다.
이에 아담스교회 교인들의 기부와 수원시민 및 종로교회 교인들의 성금으로 교사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 건물 공사는 삼일학당의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평양감옥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난 임면수 선생의 총괄 지휘로 지어졌다. 건물의 이름은 아담스교회의 도움을 받아 건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아담스기념관(North Adams Memorial)’으로 명명됐다.
아담스기념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의 벽돌조 건물이다. 당시 건물구조로는 드물게 주출입구가 중앙에서 오른편으로 치우쳐 지어졌다. 경사진 우진각 지붕에는 환기를 위해 삼각형 창을 설치하는 등 실용성을 신경 쓴 점도 눈에 띈다. 삼일학교는 기존 교회 건물을 빌려 쓸 때 70~80명의 학생만 수용할 수 있었지만, 아담스기념관이 지어지자 수백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게 됐다.
또 아담스기념관은 수원지역 독립운동가인 박선태, 이득수 등이 설립한 비밀결사단체 구국민단이 아담스기념관에서 금요일마다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지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수원 독립운동의 상징적 장소로 사용됐다.
경기도기념물 제 175호로 지정된 아담스기념관은 현재 삼일중학교의 도서관 등 교육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방문한 아담스기념관은 여전히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아담스기념관은 붉은 벽돌에 서양식 창틀을 가졌고, 기념관 외곽을 따라 걷다보면 한자로 적힌 삼일학교의 표지석도 확인할 수 있었다.
■ 인재 양성 통한 독립운동 꿈꾼 ‘임면수 선생’

수원지역에서 애국계몽활동가이자 인재 양성에 몰두한 교육자인 임면수(1874~1930) 선생은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의인이다. 임면수는 1874년 6월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 299번지에서 출생했다. 성인이 된 이후 실용적인 근대 학문에 뜻을 둔 그는 수원 양잠학교를 졸업하고, 일어 공부를 위해 사립 화성학교를 재학했다.
서울 상동교회에서 운영한 상동청년학원의 야간학교를 다닌 임면수는 대한제국기 수원지역의 여러 조직에서 활동했다. 그는 수원지역 유지들과 함께 삼일학교를 설립했고, 삼일학교 교감과 교장을 역임하며 사립학교 설립 운동을 후원하는 등 교육운동에 힘썼다.
그는 1907년에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수원으로 확산시키는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은 그의 활동의 전환점이 됐다. 그는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 기지에 대한 뜻을 모았고, 이에 임면수도 동참했다.

삼일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임한 임면수는 만주에서 1920년 체포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감 이후에는 수원으로 돌아와 아담스기념관 건립 감독관으로 참여했다.
임면수는 민족을 위해 자신의 재산도 아낌없이 사용했다. 19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화재 참변으로 동포들이 어려움을 겪자 모금 운동에 동참했다. 1907년에는 수원에서 삼일학교 모금운동에 참여했고, 만주로 망명할 당시 그가 내놓은 부지에는 1913년 삼일여학교가 세워졌다.

/한규준기자 kkyu@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