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콘텐츠 자막·수어·음성해설 등
접근성 기능이 제공되지 않아 이용 한계
정책도 교통·시설 등 오프라인에 갇혀있어
미국·영국은 2000년대부터 이미 법제화
경기도의회 조례안 전국 첫 시도 주목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는 시대다. 지하철에서도, 병원 대기실에서도 심지어 시골마을의 한편에서도 영상 콘텐츠는 일상처럼 소비된다. 하지만 이 혜택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현실을 외면한 순진한 착각이다. 디지털 세상의 그림자 속에서 여전히 철저히 배제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들이다.
경기도에만 약 59만 명의 장애인이 등록되어 있고, 그중 42%가 중증장애인이다. 이들에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는 그림의 떡이다. 시각·청각·지체·발달장애 등 유형을 불문하고, 자막·수어·음성해설 등 접근성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 한 콘텐츠는 사실상 ‘닫힌 세계’일뿐이다. 문화·여가·교육의 접근권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명백한 국가의 무관심이자 구조적 방치다.
한국 사회의 장애인 정책은 그동안 ‘오프라인’에 갇혀 있었다. 교통약자를 위한 저상버스, 장애인 복지관 건립, 활동 지원 서비스 등 물리적 접근성을 중심으로 한 정책은 그나마 진전이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상황이 정반대다. ‘정보 격차’는 이미 ‘문화 소외’로, ‘교육 격차’로, 더 나아가 ‘삶의 질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OTT 서비스인 넷플릭스, 웨이브, 디즈니플러스 등은 매년 수천억 원의 수익을 내고 있지만, 그 이윤 중 극히 일부도 장애인 접근성 개선에 사용되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은 이미 2000년대부터 이러한 문제를 법제화했다. 미국의 장애인법(ADA)은 연방정부 지원을 받는 방송·온라인 콘텐츠에 대해 자막 및 음성해설 의무화를 명시하고 있고, 영국의 Ofcom은 방송사와 OTT 기업에게 접근성 강화 목표치를 설정해 매년 보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민간의 자율에만 맡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뒤처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필자가 제안한 ‘경기도 장애인 온라인콘텐츠 이용 등 지원 조례안’은 전국 최초로 장애인의 온라인 접근권 문제를 조례로 규정한 시도다. 조례는 저소득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OTT 이용 요금을 지원하고, 장애인 맞춤형 콘텐츠 제작, 이용 조력, 홍보를 포함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지금까지 중앙정부나 대형 플랫폼 기업은 이 문제에 침묵했는가? 왜 장애인을 ‘고객’으로조차 고려하지 않았는가? 그 답은 명확하다. 장애인의 목소리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고, 기업의 시장 논리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다. 지금껏 장애인은 디지털 시대의 ‘무연고자’였다. 그들을 위한 화면은 없었고, 음성도 없었으며, 선택지도 없었다.
경기도의 이번 시도는 단지 하나의 조례 제정이 아니다. 이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사회’로 향하는 작은 첫걸음이다. 그러나 진짜 변화는 이제부터다. OTT 콘텐츠 제작 초기 단계에서부터 접근성 기능을 고려한 설계가 필요하며, 관련 전문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기술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민간기업의 자발적 참여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앙정부가 뒤따라 입법화하고, 예산과 제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지방정부의 선도적 시도를 뒷받침하는 국가 차원의 제도화 없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무엇보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문화 향유는 선택이 아닌 기본권이라는 점이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는 콘텐츠’는 곧 배제이고 차별이다. 정보 접근권과 문화 접근권이 법적 권리임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장애인을 더 이상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된다. 복지가 시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경기도의 이번 조례는 그 시작이다. 이제 중앙정부와 국회, 타 지자체, 플랫폼 기업, 시민사회가 응답할 차례다. 모두가 움직일 때, 그 변화는 현실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또 한 번 역사의 부끄러움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박재용 경기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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