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이 들이굽지 내굽나'라는 말처럼 나날이 발전하는 한국영화를 지켜보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즐거움이다. '아나키스트'(29일 개봉)는 한국 상업영화가 또 한건 해냈다는 탄성을 내지르기에 그리 부족함이 없는 수준을 보여준다.

'아나키스트'는 무결점의 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 한마디로 '볼거리'와 '역사적 맥락'과 '필름 느와르적 비장미'를 맛깔스럽게 배합해낸 보기좋은 상업영화다. '역사적 맥락'은 민족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사상으로 권력·지배없는 사회건설을 주창했던, 이로인해 필연적으로 매장될 수밖에 없었던 1920년대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을 무덤밖으로 끌어낸 점이다.

영화는 상하이를 무대로 깔끔한 외모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대일본 테러를 감행했던 5명의 아나키스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허무주의 인텔리겐챠 세르게이(장동건), 낭만적 휴머니스트 이근(정준호), 냉철한 사상가 한명곤(김상중), 과격한 행동주의자 돌석(이범수), 그리고 영화에서 이들 네명을 회상하는 소년 테러리스트 상구(김인권)다.

사실 디지털시대에 '독립운동'은 자칫 낡은 소재로 매도당할 수도 있다. 신예 유영식 감독은 이런 위험을 이들이 아나키스트이기전에 젊은 혈기로 불의에 맞선 시대의 남성들이었음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비껴갔다. 영화는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부터 배척당한 아나키스트들의 상황을 곳곳에 삽입했지만 결국 관객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이 시대가 잃어버린 '참 영웅'의 모습이다.

영웅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영화는 비장미를 강조하는 홍콩 느와르 공식의 알파와 베타를 충실히 끌어들였다. 느린 화면으로의 갑작스런 전환이라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인 죽음등이 그런 것들이다. 중국 현지 올로케로 1920년대 상하이를 완벽에 가깝게 재현해내며 볼거리를 제공하고 시각적 완성도를 높인 점도 이 영화의 매력. 세르게이를 온 몸으로 사랑하는 일본여자 가네꼬(예지원)가 등장하는 부분에서의 허점을 제외하면 드라마도 비교적 탄탄한 편이다. 주연배우들도 그 역할을 넉넉히 해냈다.

뒷골목 영웅 내지는 아웃사이더에 매몰돼 억지 상황을 남발하는 최근의 홍콩 느와르와 비교하면 이런 '아나키스트'의 장점은 더욱 명백해진다. 상업영화로서 적당한 볼거리에다 역사적인 메시지, 그리고 보편적인 영웅의 정서까지 제시했는데 또 뭘 바라겠는가!. /金淳基기자·islandkim@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