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질주가 싫다.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이 돌고 도는 말의 원형 트랙속에서 가지 않은 길을 꿈꾸는 자는 불행하다. 세인들은 그를 똥말이라고 부른다.' (변마의 독백 中)
천민 자본주의의 풍자와 깊은 허무를 보여주었던 시인 유하가 이번에는 경마장으로 갔다. 그리고 스포츠지 연재만화 천일야화에서 따온 '천일馬화'(문학과지성사)를 들려준다.
시 속에서 주인공은 허망하게 퇴색한 꿈을 쥐고 경마장을 헤매며 비루한 욕망을 뿜어내고, 카운터파트(counterpart) '변마(便馬·똥말)'도 이에 질세라 독백으로 심경을 토로한다. '하긴 대한민국 경마장의 말치고 똥말 아닌 게 어디 있는가'.
경마장은 또 개인들의 허황한 백일몽(白日夢)만이 난무한 곳은 아니다. 누추한 인생이 자신을 통째로 마권에 저당잡히는 도박본능이 판치는 이 곳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투명하고 실감나게 보여주는 곳이다. 그래서 풍자와 비판으로 맞설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와 문학의 소통을 시도했던 시인은 이번에도 대중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욕망을 보고 사회를 뒤덮고 있는 천민문화를 바라본다. 그렇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집 전체를 뒤덮고 있는 풍자의 이면에서 시인은 슬픔이 깃들인 눈으로 더 높은 가치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다. 꿈틀거리는 욕망과 허무의 대척점에서 바라본 진정한 삶에대한 동경은 더 순수하다.
시인은 '몽상가의 유일한 꿈은/호접의 나래를 타고, 이 사막의 세상에/낮꿈의 꽃가루를 매개하는 일/설령 그게 안개에 휩쓸려 낙엽으로 떨어진/물 위의 나비떼 주검처럼 헛된 망상일지라도,'(나비와 몽상가 中)라고 한탄하기도 하고 '얼마나 나를 잃어야 나를 만날 수 있는가/나는 매일 나의 낭떠러지를 살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로 천민문화의 상징을,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 키치문화의 단면을 예리하게 통찰했던 시인은 시집의 표지글에서 자신에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경마장의 함성과 한적한 자전거의 길…나는 그 경계를 걸어간다. 마치 칼날 위를 걷듯.”
/柳周善기자·jsun@kyeongin.com
시인 유하 '천일마화' 출간
입력 2000-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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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2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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