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지역에서 비적, 공비, 비도 등으로 불린 중국 마적(馬賊)은 때론 독립군의 둘도 없는 동지였고, 한편으로는 투쟁전선에 치명타를 입힌 불구대천의 적이었다.

1933년 간도지방 일본총영사관이 작성한 「간도지방 치안개황에 관한 건」을 보면 일제가 얼마나 마적을 두려워했으며 큰 피해를 입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마적과 합세한 조선 독립군 일부의 출동을 확인다.마적활동이 치열해 치안이 전면적 위기에 빠졌다.32년 한햇동안만 기습 18회 등 3백22회의 전투를 벌였으며 모두 4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1935년 일본영사관측의 「기밀 41호」는 1927년부터 1936년까지 10년동안 무려 4천7백64회 비적 출몰과 18만9천5백85명의 인원을 확인했다고 전하고 있다.

반면 이도구참변처럼 일군과 연합한 마적들의 독립군 공격을 견디다 못한 「백마탄 김일성」 金擎天장군은 1920년초 러시아에서 창해청년단까지 조직해 마적소탕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적이 이처럼 위세를 떨치자 마적으로 분장한 일본인들이 중국인 밭을 몰래 파헤친 뒤 조선인이 그랬다는 소문을 퍼뜨려 조선인과 중국인간에 싸움을 부추긴 길림시(吉林市) 「만보산사건」(1931년) 같은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