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빈현(新賓縣)은 만주족의 성지(聖地)다. 청(淸)왕조를 세운 누루하치의 고향이자 선조를 모신 청영릉(淸永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빈은 우리 민족에게도 일종의 성지가 아닐까. 무자비한 피의 탄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투쟁의 대오를 형성했던 독립정신의 성지.

광명학교로 출발해 후일 강전자속성군관학교로 뿌리를 이어가며 1920~30년대 독립군 양성의 주춧돌 역할을 한 화홍학원과 남만학교가 있었던 곳, 30년대초 조선혁명군 총사령 楊世鳳장군이 신빈대첩 승전보를 엮어냈던 지역, 남만유격대의 창시자로 공산주의 혁명열사인 李紅光장군(1910~1935?)이 동북인민혁명군과 연합해 눈부신 활약을 펼치던 본거지···.

신빈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북산 밑자락에 만주족 李春潤장군의 동상과 나란히 세워진 李紅光장군의 동상 앞에서 인동초(忍冬草) 같은 항일열사들의 삶을 떠올려 본다. 비록 출신배경이나 투쟁노선은 달라도 선배들이 궤멸되다시피한 빈 자리를 다시 메우며 총을 들었던 치열한 투쟁정신.

취재진은 이도구(二道溝)참변(1924년)과 신빈참화(1932년)의 현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들에 의해 대한통의부원 1백여명이 죽거나 다친 이도구참변과 작전회의 도중 기습당해 조선혁명군 주요간부들이 일망타진된 신빈참화는 8년이라는 시차 때문에 오히려 신빈일대를 무대로 한 줄기찬 항쟁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신빈에서 통화방향으로 60리를 달려 도착한 왕청문진(旺淸門津) 강남촌(江南村). 마을 옆 샛길(폭1.5m)을 따라 20분쯤 들어가자 만주벌 계곡을 휘감아도는 칼바람속에서 10여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도구마을이 나왔다.

요령성(遼寧省)신빈현 문화관원 全正革씨(52)는 『이도구골짜기는 한때 일본군들이 독립군 시체들을 야산 나뭇가지에 굴비엮듯이 걸어놔 밤이면 승냥이들이 욱시글득시글 거렸다』며 『마을 사람들이 밤에는 문을 잠그고 나갈 엄두도 못냈다』고 했다.

마을은 고요했으며 집집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수북히 쌓아논 장작더미로 미뤄 사람이 살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기우뚱 기우뚱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맡긴지 30분만에 취재진은 계곡 중간중간에 너른 평지가 펼쳐져 있는 분지형태의 이도구골짜기에 도착했다. 계곡 양쪽에는 마치 인위적으로 쌓아 놓은 듯한 방어벽이 눈에 들어왔다.

독립군들은 아마 이곳 너른평지에 군영을 구축하고 계곡 양편에 있는 천연 방어벽을 초소로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믿었던 방어벽은 1924년 7월 2일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인근 통화현(현 通化市) 주재 일본영사분관의 사주를 받은 중국 본토 마적과 일군 3백여명의 기습이었다.

申八均사령관의 지휘아래 야외군사훈련을 받고 있던 대한통의부대원들은 황급하게 전투대형을 갖추려고 시도했으나 마적떼는 이미 막사를 향해 질풍같이 말을 내닫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중국(마적)과의 무의미한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판단한 申사령관은 대원들에게 인근 야산으로 대피하라고 다급하게 외쳐댔다고 한다. 그러나 총 한번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등을 돌린 독립군은 여기저기서 쓰러져갔다. 부하들을 독려하느라 미처 자신의 몸을 숨기지 못한 申사령관 역시 흉탄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중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신빈에서 10리가량 떨어진 동창대(東昌臺) 홍승랍자산(紅升@子山)까지 피신했으나 결국 그 곳에서 4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東川 申八均(1882~1924). 한성 출생으로 1910년 만주이주후 독립군 양성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냈고 1백회 이상 일제주재소, 헌병대 습격에 참가했으며 군자금모금에도 깊숙히 가담했던 그는 눈을 감기전에 『일제와 싸우다 의연하게 죽으려고 했는데 중국사람과 싸우다 죽는구나』라며 통분했다고 한다.

이도구 전투가 끝난뒤 중국마적으로 분장한 일본인 시체 3구와 대마적(對馬賊)정책문서가 발견됨으로써 이들의 행위가 일제사주에 의한 소행임이 밝혀졌다. 또 동원된 마적은 당시 조선족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견지했던 중국 張作林 군벌부대와 경찰들로 확인됐다.

이도구 참변은 대한통의부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1922년 17개 단체가 모여 남만지역 최대 독립군 조직으로 탄생한 대한통의부는 분파주의를 극복하지 못한채 이듬해 대한의군부, 참의부, 대한통의부 등 3개단체로 다시 나뉘었다. 참변 당시 통의부대원들은 申사령관의 지휘아래 분파주의를 극복하고 새롭게 전열을 정비해 보자며 훈련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결국 살아남은 대원들은 의성단, 주민회와 함께 정의부로 통합됐다.

현장을 함께 둘러본 姜龍權교수(55·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는 『申사령관은 金佐鎭, 洪範圖, 金東三 등과 함께 조국 독립위해 항일투쟁을 전개한 걸출한 인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