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사 설립에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선생은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다.약관 20세부터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적 사고와 행동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선생은 1867년 서울 남산골에서 이유승(李裕承)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냈고 그의 10대조는 임진왜란이래 다섯번의 병조판서, 세번의 좌·우정승과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다. 백사이래 이유승에 이르기까지 9대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냈다.
그의 형은 건영, 석영, 철영의 순서이며 아우로는 시영, 호영등인데 아우 이시영은 광복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이처럼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명문가 50여 가족이 국치이후 1910년 모두 만주로 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다.
선생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운동(1898년), 을사오적 규탄(1905년), 신민회활동(1907년), 경학사조직(1911년), 신흥무관학교 설립(1912년),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조직(1924년), 항일구국연맹조직(1931년)등 값진 투쟁을 전개했고 1932년 일제에 체포돼 고문에 못견뎌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지난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같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우당장학회가 지난 84년 선생의 친손자인 이종찬(李鍾贊) 국가정보원장(전안기부)을 비롯, 뜻을 같이하는 몇몇 인사들에의해 1억5천만원의 장학기금으로 활동을 시작, 독립지사 후손들을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펼치고 있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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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항일투쟁 현장답사-5] 우당 李회영선생 家系
입력 1999-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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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1-2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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