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이주하면서 처음으로 집단정착해 항일(抗日)의 칼을 갈았던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吉林省 柳河縣 三源浦). 경학사(耕學社)라는 최초의 반일자치기구를 설치, 농사를 짓고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독립운동의 발원지 역할을 했던 이 의미깊은 개척의 땅에서 취재팀은 이방인이었다.
경학사는 위치도 흔적도 찾을수 없었다. 지난날 선구자들이 이곳에 뿌렸을 땀과 한의 자취를 찾아 나섰으나 취재팀을 반긴 것은 농한기라 일거리가 없어 이방인의 출현이 오직 관심사의 전부인 것처럼 줄줄이 따라오는 중국인들 뿐이었다.
낯선땅 중국인들의 텃세에 밀려 온갖 질시와 따돌림을 당하며 나라잃은 설움과 울분속에 이를 악물고 독립의 의지를 다졌을 선조들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우선 조선족을 찾기로 했다. 9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후손들에게서라도 선조들의 고난과 투쟁의 체취를 느끼고 싶었다. 조선족은 중국인들과는 달리 반드시 지붕에 처마를 만든다는 연변의 한 조선족 말을 기억하고 지붕모양이 다른 한 집을 찾았다. 정말로 조선족이 살았다. 독립군의 후손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조선사람은 지금도 조선사람이디요. 아무리 여기서 오래 살아도 조선사람끼리 더 잘 어울리고 친합네다.』
김춘덕(金春德)씨(59·여). 경기도가 고향이지만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 함흥에서 살았고 40년대 초기에 중국으로 이주, 50여년을 넘게 이곳에서 살았다.
『이곳에 온 조선사람들은 당시 바가지하고 양재기만 가져왔시요. 거지였지요, 거지. 하지만 이제 밥은 먹고 삽네다.』
32가구에 불과한 조선족의 촌장을 맡고 있다는 김씨는 모처럼 만난 한국인들에게 연거푸 조선족 얘기를 해댔다.
『여기가 조선사람들이 처음 집단정착한 곳이란 걸 우리도 압네다. 아버지와 어른들이 이곳의 유래도 얘기해주고 이 근처 어딘가에 「경」뭣인가 하는 기구가 있었다고 합디다.』
취재진은 이런 식으로 흔적도 없는 경학사 옛터를 찾아냈다.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이도구향(二道溝鄕) 명성촌(明星村). 삼원포에서 2㎞ 떨어진 추가가(鄒家街)에서 서북쪽으로 다시 2.5㎞를 달리다보면 넓게 펼쳐진 비옥한 평원이 나타난다. 눈짐작으로도 수백만평은 될 법한 기름진 땅 주변에는 야트막한 산들이 방풍림처럼 둘러섰다. 군데군데 제법 큰 마을들이 이 땅의 주인임을 말해주고 있다.
마을회관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 유리창 밖으로 외국의 이방인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수십여 남자들의 시선에 「혹시 사진촬영을 막지나 않을까」하는 부담을 느끼며 좀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경학사가 자리잡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평야가 나타났다.
생업이라고는 닭과 오리, 소들을 키우는 축산과 옥수수 농사가 전부인듯한 농가가 초가와 기와로 지붕을 얹은채 경학사터 옆에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이곳 낯선 터전에서 개척자들은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논밭을 갈고 군사훈련과 교육을 받았을 터이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서울의 자택에서 이동녕, 여준, 장유순등과 함께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한다.
1910년 어느날 이회영은 이동녕 등과 상인으로 가장하고 서울을 떠나 일제의 삼엄한 경계를 피해 초산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독립운동 사상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는 전략적 이동을 위한 고찰답사가 시작된 것이다. 고찰단은 남만의 여러지방을 답사한후 최후로 유하현 삼원포를 새로 개척할 기지로 정했다.
그해 12월 이회영의 6형제(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는 가산을 처분하는 한편 가솔 40여명과 함께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이씨 일가는 환인현에서 혹독한 만주의 겨울을 지낸후 1911년 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도착, 개척의 봇짐을 풀었다.
그러나 정착의 길은 멀었다. 당시 조선을 삼킨 일본이 중국의 동북 3성을 호시탐탐 노리며 그들의 관할하에 두려 했고 이같은 일본세력에 저항할 힘이 없던 중국의 3성 총독 조이손이 이들의 정착에 반대도 지지도 하지 않으며 만나주지 않았다.
이회영 등은 북경에 들어가 이조판서로 있던 부친(李裕承)과 친분이 있었던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나 『조선 국내에서는 일본의 통제가 극심하니 중국 동북에서 경농, 교육, 상업, 연병의 권리를 가지도록 허락해 달라』며 『조선인들이 힘을 키워 일제와 싸움을 벌이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원세개가 이회영의 요구를 들어 거주권, 경작권, 교육권, 자치권을 주면서 유하, 통화, 환인 3현에서 조선인들이 정착하게 됐고 결국 동북 3
[만주항일투쟁 현장답사-5] 항일운동 발원지 吉林省 柳河縣 三源浦
입력 1999-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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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1-2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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