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발해. 수천년의 세월동안 비바람과 눈서리를 맞으며 모진 시련을 견디어온 땅.

지금은 남의 소유가 됐지만 이 땅은 발해의 땅이었고 이전에는 고구려 강토였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선의 영토였던 우리 한민족의 고토(古土)다.

세찬 바람으로 꽁꽁 얼어붙은 이 땅에 98년 11월의 어느날 취재팀은 가슴벅찬 감동으로 섰다.

오랜 세월 원래의 주인이 돌아오길 목놓아 기다렸다는 이 땅의 외침을 들었다면 찬란했던 과거를 동경하는데서 비롯된 지나친 감상일까.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黑龍江省 寧安市 渤海陳).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일컬었던 발해국의 지명이 아직도 맥을 잇고 있는 이곳은 당시 발해의 도읍이었던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를 알리는 표석을 시작으로 그리스 파르테논신전이 부럽지 않았던 거대하고 웅장한 궁궐터등 곳곳에서 1천5백여년전 발해의 흔적으로 방문객을 유인한다.

그러나 기왓돌과 우물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건물의 밑둥등 잔해들에서나 당시의 화려했던 왕국의 모습을 유추해볼수 있을 뿐 덧없는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한다.

16부(府) 1백30개 현(縣)을 호령했던 왕실의 권력과 영화는 오간데 없이 발해진은 이제 불과 60여년전 나라를 잃은 우리민족의 비장하고 눈물겨운 또다른 투쟁의 역사를 껴안고 있다.

드넓은 평야를 삼키려는듯 「둑」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방대한 저수지가 시퍼런 물을 쏟아붓고 있다.

아보(阿堡)수력발전소다.

비록 저수지에 모든 역사가 묻혀버렸지만 이곳은 일본의 압제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온 한민족들이 생존을 위해 보를 만들고 평야를 일궜으며 조국광복의 그날을 위해 가열찬 항쟁을 해온 독립운동기지였다.

1914년 화룡시(和龍市)의 청파호에 총본사를 마련했던 대종교는 1920년 밀산현 당벽진(密山縣 堂碧陳), 1922년 영안시 남관(南關), 또다시 밀산현 당벽진으로 이동을 거듭하다 1934년 이곳 영안시 동경성(東京城)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1911년 대종교에 입교한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선생은 국내에서 독립운동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33년 발해진으로 망명, 대종교 총본사가 이곳으로 옮겨온 후부터는 대종교 총본사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다.

안희제는 가산을 정리해 1931년부터 이곳에 토지를 구입하기 시작했고 발해농장 경영에 착수했다.

농사를 위한 둑과 보를 쌓았다.

발해농장에는 주로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남한지역의 이주민 3백여호가 정착했고 안희제가 고안한 자작농창제(自作農創制)를 시행했다.

자작농창제는 이주농민에게 분배한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의 절반을 수곡(收穀)하는 대신 다른 지역의 농지개간과 수로 개설을 허용하고 5년후에는 또 다른지역의 농토를 개간하고 수로를 개설하도록 하는 제도로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해 자작농을 육성하는 제도였다.

그들에게는 교육도 필요했다.

안희제는 이주농민과 2세들에게 신교육과 함께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는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발해진에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정력을 쏟았으니 발해농장은 겉으로는 농지개간사업을 하는 농장에 불과했으나 실은 국외독립운동 기지였던 것이다.

안희제는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尹世福)과 아들 윤필한(尹弼漢)등 대종교 간부들을 국내에서부터 조직해온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시켰다.

윤세복은 1934년 하얼빈으로 가서 만주주재 일제의 전위기관인 관동군특무기관·하얼빈총영사·조선총독부특파원 등과 교섭, 만주지역에서 대종교 포교활동을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하얼빈시에 대종교선도회를 설치하고 이어서 안희제가 영안시 동경성에 대종교 총본사 현판을 달았다.

당시 서적도 간행해 홍범규제(弘範規制), 삼일신고(三一神誥)등 8종의 서적을 3만5천부가량 발간했고 매년 4회에 걸쳐 교보(敎報)도 간행하는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황무지땅에 땀을 뿌려 옥토로 개간, 여기서 나온 수익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하고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져온지 8년여만인 1942년 3월 대종교총본사에서는 우리의 땅 발해고궁지에 반만년 역사 단군의 뜻을 계승하고자 천진전 건축을 추진했다.

안희제는 다음달인 4월 신병치료를 위해 귀향한뒤 그해 10월에는 천진전건축주비회 총무부장으로 임명됐다.

동행취재에 나선 姜龍權연변사회과학연구소 교수는 『이무렵 조만춘이라는 사람이 대종교활동에 참여했는데 그가 만주국 사법과 밀정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며 『민족의식 고취로 대종교의 교세가 확장돼 독립운동 세력으로 나날이 발전하자 위협을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