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간은 추억이라는 말만으로도 아름답다. 더욱이 돌아가 더듬어볼 추억의 장소가 그대로 존재한다면 지친 일상의 활력이 된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돌아볼 추억의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산업화 과정에서 실용이라는 논리에 의해, 지금 우리의 기억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유년의 골목길은 네온이 춤추는 널찍한 신작로로, 들판은 고층의 아파트 단지로 변했고, 국민학교는 첨단시설의 초등학교가 되었다. 작지만 우리의 삶을 지배하던 기억은 저편 희미한 파편으로 남을 뿐이다.

최근들어 중앙이나 지방정부에서는 문화재 복원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과정에 우리 터전은, 우리의 추억은 이전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복원은 역사와 전통, 문화의 논리가 동원되지만 그 또한 관광산업과 연계된 경제 논리가 바탕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서구의 경우에는 복원보다는 유적(遺蹟)으로 남겨놓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대부분 대리석 등 석재로 이루어진 건축 재질이 목재로 이루어진 우리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복원만이 능사라 여기지는 않는지 되짚어볼 필요는 있겠다. 단지 사람을 모으는 '역사재현단지'의 세트장으로 전락되어서는 안된다. 정신이 배어있지 않으면 복원한들 박제에 불과하다. 만약 '화성'에 정조의 개혁사상이 녹아있지 않다면 '화성'의 의미는 없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자랑하는 수원이 인재의 고른 등용과 백성을 위하는 실사구시의 가치를 실현하지 않는다면 '그 자랑'은 허언이다. 도시 곳곳에, 시민마다, 실사구시의 정신이 숨쉬고 있어야 한다.

30여년 동안 수원 팔달산 기슭에 자리하던 강감찬 장군 동상이 광교공원으로 이전한단다. 그 자리에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셔놓은 사당 성신사(사적 제3호)가 복원된단다. 강감찬 장군이 수원과 연고가 없다는 것과 화성의 복원이라는 이유로…. 이번 이전과 복원 결정은 충분히 그 타당성이 검토되었겠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연고는 물론, 강감찬 장군 동상 앞에서 찍은 빛바랜 유년의 흑백사진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필자는 이제 강 장군과의 '연고'를 어디서 확인하여야 할까? 30여년 동안 간직한 개인사(個人事)가 역사(歷史)의 복원으로 낯모르는 곳으로 이전되었다. 현재가 흐르면 과거가 되고 역사가 된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과 그 시간도 소중하게 간직되어야 한다. /문화커뮤니케이터·남서울대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