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와 자셔도 좋소. 왜사냐건 웃지요'.

시인 김상용(1902~1951)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다. 잠시 기억을 되살려보면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시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잠시 국어 수업시간으로 돌아가 시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볼까 한다. '창을 남쪽으로 내겠다'는 제목부터가 일상 생활의 건강하고 낙천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에 대한 굳은 신념을 나타내면서도, 역설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가벼운 해학과 더불어 다소 자유로움을 표현하며 매우 감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점이 이 시의 특별한 매력이다.

특히 함축성과 표현의 간결성 및 탄력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도회 생활의 공허한 삶은 생각지도 않고 무슨 재미로 전원에 파묻혀 사느냐고 질문하는 친구에게 만족한 대답을 주려면 한 권의 책을 써도 모자랄지 모른다. 하지만 장황할 수 있는 그 대답을 시인은 그저 '웃지요'라는 단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제 시대의 암담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찾으려 애써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심리도 보여진다.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회의, 번민, 사색, 해답, 결심이 하나로 압축된 자신의 생활관을 실증하는 웃음인지 모른다. 짧은 시 구절에 담긴 의미가 참으로 깊고 다양하다.

△시인 김상용, 친일논란

김상용 시인은 전원적 경향, 자연친화적 경향으로 이러한 특성은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한다.

자연 속에서 영위되는 삶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꿈꾸고 있다. 일상적인 삶에서 연유하는 숱한 고뇌와 비애를 자기성찰속에서 초월하려 노력하고 있다.

김상용은 1902년 경기도 연천군 출신이다. 경성제일보고를 거쳐 일본 릿쿄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문학인으로서 평생을 살면서 이화여전 교수와 강원도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과서에도 수록된 시인의 친일행적이 드러나면서 무수한 논란을 일으켰다.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해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취지로 세워진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2002년 발간한 문학예술계 친일인명사전에 김상용은 모두 42명의 친일문인 중 한명으로 올라와 있다.

1943년 경성매일신보에 일제의 의용대 모집을 독려하는 내용의 글을 게재했던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연천군 왕림리 출신 김상용,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학인

지난 9일 시인 김상용의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그곳(연천군 왕림리 죽터골)은 이미 수십년전부터 군부대가 들어서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당연히 김상용의 생가나 그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연천군 왕림리 주민들은 김상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 친일행적으로 정부에서조차 외면받은 그를 위해 시비를 세웠다.

시비를 세우는데는 친일과 같은 정치적·이념적 계산은 철저히 배제하고 그저 연천군 왕림리 주민들의 김상용에 대한 순수 문학적인 사랑만을 담았다고 한다.

왕림리 주민들은 지난 2004년 문화관광부에 김상용에 대한 평가와 함께 지역 출신 문인을 추모하기 위한 지원사업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보다 2년전 이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던 터라 문화관광부는 친일 행적 문인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밝혀왔다.

그후 주민들은 김상용이 현재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가치를 순수 문화예술적인 관점에서 평가해주길 바라며 계속해서 김상용 바로 알리기에 나섰다.

왕림리 주민들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벌어졌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 고장 출신의 훌륭한 문인으로서 전국적으로 지역을 알리고 그의 작품을 문화자원으로 인식하고 이를 발굴·개발하는 목적으로 시비 건립을 추진했다.

시비 건립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윤상협씨는 "시인 김상용을 추모하는 시비를 건립하는 것은 순수한 목적으로 우리 마을 출신이라는 자부심만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문학사적으로나 문학적 인지도면에서 마땅히 높게 평가받아야 할 그가 지역에서 등한시 여겨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윤씨는 "파주에는 김광섭, 주요섭, 양주에는 이수광의 시비가 이미 건립이 돼있고 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일부 논란이 있지만 문학적인 그들의 평가는 무시하지 못하는 게 사실아니냐"며 "정부나 해당 자치단체에서 하지 못하는 부분은 충분이 이해하지만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 것이라 여겨지는데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우여곡절끝에 세워진 '남으로 창을 내겠소' 시비는 윤씨와 같은 주민들의 여망이 담긴 결정체다. 너무나도 초라해 보이는 시비. 하지만 주민들의 애향심과 자부심이 한데 어우러져 그 의미만큼은 너무나도 짙게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6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왕림리. 그곳의 주민들은 김상용이 그 지역 출신 문학인이라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행정기관을 통한 지원은 아예 엄두도 못냈고 더이상 바라지도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주민들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애향심으로 그 빛은 앞으로도 더욱 발할 것이라고 한다. 무려 3년여에 걸친 주민들의 노력으로 시인 김상용은 친일 문인이라는 현실의 평가속에서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서 남겨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