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은 2007년까지는 있었지만 2008년 가을 현재는 없다. 동사무소도, 주민도, 식당도, 원천유원지도 없다. 오랜 기간에 걸친 생성, 축적, 변화, 소멸이란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전 과정을 동민들의 삶과 문화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면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동민들의 일상 속에서 형성된 문구를 동담(洞談)이라고 규정하자. 그 말은 동민 스스로 느낀 동의 변화과정임과 동시에 서사적인 파노라마 그 자체가 아닐까. 이제 동민들이 남긴 상징적인 문구와 필자의 시각 몇 개를 더해 하나씩 음미해 보자.

# 축적된 전통과 역사
하나, "산의실의 큰 어른은 청천(靑川)부원군 심온이야."
심온(沈溫·1365~1418)은 생몰 연대, 묘역 조성시기, 그리고 방영 중인 '대왕 세종'의 장인이란 지명도까지 포함하여 동에서 그 연고가 가장 깊고 오래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동수원IC 사거리 산자락에 묘가 위치해 있다.
둘, "우리 동은 조선시대에는 지내면(枝內面)의 하리·의상·의하라 불렸고, 일제 이후에는 수지면(水枝面) 이의리(二儀里)라 했어." 70대 어느 향토사학자의 이 말은 옛 문헌으로 그대로 증명된다. 즉, 조선시대 지내면 지역이었다가 일제가 통폐합을 단행한 1914년부터 용인 수지면 이의리가 되었다. 이후 팔달구 이의동에 속했다가 신도시 개발로 2003년 11월 신설된 영통구 소속으로 바뀌었고, 2007년 8월 원천동에 통합됐다.
셋, "우리 동네는 통마다 주요 성씨가 다 있어." 관내에는 청송심씨와 청주한씨가 유력한 성씨이며, 곳곳에 안동김씨, 전주이씨, 죽산안씨 등 통마다 대표하는 성씨가 폭넓게 분포했다. 점차 동족의 토박이들도 개발, 취업, 자녀 교육문제 등으로 외지로 나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금은 '명품 광교신도시' 개발 여파로 집성촌은 물론 선산조차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말이다.

# 우리는 한 가족
넷, "몇 회냐?" "몇 회입니다."
초등학교는 산의초등학교가 유일했는데 제1회 졸업생이 60대 중반으로 대다수의 주민은 학연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었다. 즉,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유대감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다섯, "1960년대 후반 원천 일대에서 막걸리 한잔했던 시절이 그리워!" 마을 어른들이 원천유원지 인근에서 민물회에 막걸리 한잔을 가볍게 즐겼던 시절을 회고했던 말이다. 수도권 시민들도 즐겨 찾던 원천유원지는 379만㎡ 규모이며 1974년 9월에 유원지 개발이 결정된 바 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 당국은 '수도권을 대표하는 4계절형의 수변 종합휴양지'를 목표로 여러 시설을 확충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신도시 개발로 현재는 개점 휴업 중이다.
여섯, "동사무소 개청식은 마을 잔칫날이야." 이의동은 1983년 용인시에서 수원시로 관할 구역이 바뀌면서 2월 15일에 동 개청식을 열었다. 이때부터 매년 열린 개청식에 많은 동민이 참석하였다. 동장을 지냈던 인사는 "아마 전국에서 개청 축하식을 꾸준히 하는 동은 별로 없을 거야. 이날은 마을잔치가 돼"라고 회고한다. 이러한 잔치도 원천동으로 통합됨에 따라 사라질 운명이다.

# 자본의 논리, 그 명암
일곱, "수지에 살았으면 수지(收支)맞았을 걸, 여기 살아서 이의(異議)만 제기해!"
용인에서 수원시로 편입된 이후 1990년대 중후반부터 현재까지 동민들의 정서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원천유원지 개발은 1990년대까지 진행되면서 주민 입장이 소외된 점, 상권이 외지인에 쏠린 사실 등 각종 불만이 쏟아졌다. 주민들은 유원지로 개발되면 지역 경제가 살아날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사업을 환영했다. 하지만 도시계획에 의해 인근 지역까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더욱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수지 일대의 땅 값이 크게 상승한 요인도 작용했다. 이 문구를 남겼던 동민들 모두는 작년에 외지로 떠나갔다. 그들 마음에 어떤 문구로 새겨졌을까 궁금하다.
여덟, "영동고속도로 때문에 동네 망쳤어!" 이의동은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편리한 교통망을 자랑함과 동시에 그로 인해 기형적으로 바뀐 마을의 경관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그 중앙을 43번 국도가 가로지르며 경기대 후문 쪽으로 난 영동고속도로 IC가 마을 중앙을 동서로 관통한다. 이 때문에 동의 최북단 마을 쇠죽골을 비롯하여 안골, 성죽골 등 많은 마을은 질주하는 차들이 쏟아내는 소음과 높이 솟은 거대한 구조물이 경관을 해치면서 마을 사이에 소통이 막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각 마을의 표지판만 쓸쓸히 남아있을 뿐이다.

아홉, "우리 동네엔 교육, 산업, 문화, 각종 편의시설이 엄청 많아."
이의동에는 일찍이 들어선 경기대학교를 비롯하여 1990년대 중반부터 각종 시설물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쓰레기소각장, 각종 주차시설, 적환장, 중소기업지원센터 등이다. 지난 10월 1일에는 경기대 후문 안쪽에 수원역사박물관을 비롯하여 총 3개의 박물관이 개관하여 문화 인프라까지 구비하게 되었다.
열, "화장(火葬)문화를 선도할 연화장 건립에 주목하자."
불과 1주일 전 국민들은 20년간 정상을 지킨 여배우가 한 줌 재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매장문화가 압도했던 시절, 이의동에 수원시립 화장장이 들어섰다. 신대저수지를 끼고 맨 안쪽에 위치한 연화장은 1995년 6월에 하동 17 외 26필지 5만6천612㎡에 대해 시립 화장장으로 고시, 결정된 바 있다. 이후 1997년 12월 공사에 착공, 2001년 1월 개원됐다.
1990년대 초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도처에서 혐오시설을 기피하는 양상이 벌어진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연화장이 큰 무리 없이 전국 지자체 중 두 번째로 정착하게 된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화장장 직원의 80%가 동 주민으로 구성되었으며, 동시에 개발과 화장장 운영에 따른 이익을 지역으로 환원한다는 운영원칙에 따라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다.

# 에필로그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이의동에도 개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이곳은 건설교통부가 1996년부터 자연녹지에서 주거용지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시기본계획 변경을 승인한 바 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시와 현대건설은 2000년 2월 투자협정에 이어 같은 해 5월 기공식까지 했다. 당시 계획은 2009년까지 12만7천여평에 컨벤션 시설과 호텔, 관망탑, 지원시설, 주거단지, 공원 등을 건설, 일정 기간 사용 후 시에 기부채납하는 것이었다.

최근 청사 건립계획이 지지부진하면서 차질을 빚고 있지만 1천100만 도민의 살림살이를 관장할 도 청사가 들어설 경우 큰 변화가 예측된다. 전형적인 농촌에서 도농복합지역으로, 그리고 '도청이 들어서는 문화, 행정도시'로의 탈바꿈 말이다. 동의 활용방안으로 '개발, 관광, 교통망, 거주공간 확보' 등 현대적인 활용도에만 주목하려는 경향이 대세이다. 가속도로 치닫는 개발정책은 거칠 것이 없다.
2008년 가을, 동의 안쪽 마을 쇠죽골 폐가 앞에 섰다. 몇 년 전 앞서 열거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르신들이 눈에 선하다. 도시화와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멋진 청사진을 기대해 본다.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