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겨울, 골목길 성명을 내고 곧장 고향 합천으로 내려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다음 날 새벽 4시께 안양교도소로 압송됐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맞섰던 검찰과 주민들 간 밤샘 대치 장면은 아직도 생방송을 보는 듯 선명하다. 시린 손을 비벼가며 담벼락 위에서 구인 장면을 취재하던 기자들 가운데 누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고로 칼 쓰는 자, 칼로 망한다". 수년 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장남이 검찰에 끌려가는 참담한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으로 가는 날, 봉하마을에 노란 꽃잎이 뿌려졌다. 서슬 퍼런 검찰이 영장을 들고 으르렁대던 14년 전과는 폼이 달랐지만 2009년 4월 30일은 역사를 거꾸로 되돌린 국치(國恥)의 날로 기록될 것이다. '반칙 없는, 특권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되지도 않을 이상적 국가론을 들먹였던 그였기에 국민들의 실망은 더 크다.
그가 폐족(廢族) 위기에 놓인 것처럼 '왕의 남자'들도 가시밭 길을 가고 있다. 한때는 검찰 인사를 주무르고, 공기업에 수십개의 낙하산을 내려보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 다발을 주체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비행기에서 난동을 피우고도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건 '통 크게 도와주라'는 대통령 일가의 말을 선선히 들어준 음덕이 없었다면 감히 할 수 없는 만용이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뭐를 잘못했느냐'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을 두고는 '정치 검찰이 먼지까지 탈탈 털어 흠집내고 있다'고 강변한다. 그러니 "대통령이 오죽 없었으면 그랬겠느냐. 이건 생계형 범죄다"는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식이 달라는데 안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 전두환, 노태우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돈이다"는 말에는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다.
세상사, 반복의 반복이다. 참여정부와 전 대통령 일가의 비극이 남의 일만은 아닐 터이다.
새 정부 출범 1년을 갓 넘겼을 뿐인데, 벌써 '추부길 리스트'에 '천신일 뇌관'이 유령처럼 떠다닌다. '만사형통'에 '상왕'으로 통하는 국회의원 형님에게 시골 노인 건평씨는 감히 견주어 볼 '깜 거리'도 아닐 것이다.
장안에는 이명박의 사슴이, 시·도지사의 사슴이 무리지어 다니고, 시장·군수의 사슴은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그 누구의 것이든 하는 짓거리는 다르지 않다. 돈 되는 일이라면 파리처럼 끼어들고, 관 인사를 주물럭 거린다. 안 되는 일이 없고, 지역의 대소사를 아우르기까지 한다.
박연차 강금원 정화삼은 참여정부 내내 신물나게 들었던 이름이다. 그 전에는 DJ의 동지들, 더 전에는 YS의 수족들이 한 시절을 휘저었다. 지금 청춘의 봄을 맞은 MB와 지방 권력의 사슴들도 계절이 바뀌면 거리를 피로 물들이는 처참한 신세가 될 지 모른다. 지금처럼 고삐도 울타리도 없이 제멋대로 발길질을 하도록 놔 먹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