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김태성기자]유시민은 1959년 7월 28일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김시민 의병장의 이름을 따 시민(時敏)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학창시절을 대구에서 보낸 그는 대구 수성초등학교와 대륜중학교, 심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했으며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 당시 쓴 '항소이유서'는 운동권 필독문건이자 1980년대를 상징하는 가장 명문으로 꼽힌다. 서울대학교 총학생대의원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 대구 심인고 재학시절(맨 왼쪽이 유시민).
정계입문은 1988년 이해찬 의원 보좌관을 맡으면서 시작한다. 그는 최근 몇몇 인터뷰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이해찬을 꼽기도 했다. 이후 독일 유학길에 올랐으며, 독일에 머무르면서 특유의 글솜씨로 한겨레신문 독일통신원을 맡았다. 1997년에는 독일 마인츠 요하네스구텐베르크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유시민은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정책기획실장을 역임했으며, 1999년에는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임교수를 맡기도 했다.
2000년에는 MBC 100분토론 진행을 맡으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특유의 말솜씨와 공정한 토론진행, 위트 등으로 인지도를 높이는 기회가 됐다.
▲ 부인 한경혜씨와 여행지에서 함께.
2002년에는 개혁당 창당에 참여해 대표집행위원을 맡았다. 정가에서는 이 시기를 유시민의 진보정치가 시작된 시점으로 해석한다. 2002년 대선 당시에는 개혁당 소속임에도 불구, 노무현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참여정부의 '공신'으로 급부상했다. '리틀 노무현'이란 별칭도 이때부터 따라다녔다. 이듬해인 2003년에는 재보선 개혁당 후보로 고양 덕양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국회 본회의장에 캐주얼 복장으로 들어가 의원선서를 하면서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그 뒤 노 전 대통령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합류했으며, 경기도당 위원장을 맡으면서 경기도와 인연을 맺었다. 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재선에 성공했다. 2006년에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유시민은 지지층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정치인이다. 최근 유시민 펀드의 인기를 반영하듯 극렬한 지지층이 존재한다. '친노'의 이미지로 노 전 대통령의 지지층을 흡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설가라는 이미지로 안티팬도 많다. 한 동료의원은 "유시민은 옳은 얘기를 왜 저렇게 싸가지 없이 할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말솜씨만큼이나 글 재주도 뛰어나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거꾸로 읽는 세계사' 등은 국민 필독서로 꼽히기도 하며, 최근에는 노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대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