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2일, 수원야구장에서 태평양 돌핀스와 OB 베어스의 프로야구 시범경기가 열렸다.
1982년부터 7년간 사용됐던 춘천야구장을 대신해 태평양 돌핀스의 보조 홈구장으로 사용될 수원야구장의 개장경기였다. 수원야구장이 그 때만 해도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삼미로 출발해 청보를 거쳐 태평양까지 7년 사이 두 번이나 간판을 바꿔달았던 그 팀의 전력은 국내에서 가장 약했고, 이로 인해 홈 주경기장인 인천 도원야구장 역시 경기당 평균 관중이 3천여명에 머물렀다. 한 때 '구도'로 불리며 한국야구를 대표했던 인천의 사정이 그렇다면, 야구에 관한 우여곡절을 겪지 못한 수원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천 도원야구장보다도 8천여 석이나 많은 2만여 석 규모의 야구장은 웅장하기보다는 오히려 황량함과 처량함만 더해줄지도 모를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 해, 극적인 반전이 이뤄졌고 수원이라는 도시에도 야구에 관한 역사의 한 획이 그어지게 된다. 1989년 시즌을 앞두고, 태평양 돌핀스는 OB 베어스의 사령탑으로 해마다 준수한 성적을 내고도 '우승시킬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는 이유로 밀려난 김성근 감독을 영입했고, 코치진 전체와 프런트의 일부까지 포함한 인사권까지 내주는 파격을 감행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여섯 시즌 동안 네 번은 '꼴찌', 한 번은 '2등'을 한 구단을 인수한 첫 해 또다시 꼴찌를 경험하며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태평양의 어쩔 수 없는 승부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사단'을 구축한 김성근 감독은 자신이 잡은 전권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겨울 오대산의 계곡물에 선수들을 담그는 극단적인 강훈련으로 팀의 체질을 바꿨다. 바로 그 시즌, 태평양 돌핀스는 정규시즌 3위에 오르며 연고지 역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기적을 연출했고, 야구장에는 전년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평균 7천여 명의 관중이 모여 야구 열기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애초 시즌 전 김성근 감독이 생각했던 마운드의 주축은 양상문, 임호균, 김신부의 트로이카였다. 각각 한국과 일본 야구계의 거물 출신에다 한국프로야구 무대에서도 각자 10승 이상씩을 경험한 베테랑들이었던 그들말고는 기댈 언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 해 이들 기둥 투수들이 거둔 성적은 모두 13승에 불과했다. 양상문이 8승으로 제 몫을 했지만 김신부는 5승으로 주저앉았고, 임호균은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해 태평양은 김성근 감독이 목표한 56승보다 6승이나 많은 62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무려 40승을 합작해낸 무명 신인 투수 3총사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이었다.
■ 'PS 첫 승리' 만든 박정현
물론 그 중에서도 백미는 19승을 올리며 신인왕에 오른 장신의 잠수함 투수 박정현이었다. 그 해 박정현은 무려 17번이나 완투하는 등 242와 3분의2이닝을 2.15의 평균자책점으로 막아내면서 타격 20위권 안에 단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허약한 팀을 3위까지 끌어올렸고, 특히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선 허리 부상으로 쓰러져 실려 나가기 전까지 무려 1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팀 역사상 첫 포스트시즌 승리를 선물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의 헌신적인 활약은 인천과 수원의 관중석을 끓어오르게 했다. 박정현이 바로 몇 해 전 야구팀을 창단한 수원 전통의 명문 유신고 출신이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그 해 처음 수원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게 된 사정과 맞물리며 경기 남부권까지 야구열기를 확산시키는 촉매제가 됐던 것이다.
물론 수원과 프로야구의 인연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 해 영광을 뒤로 또다시 짧지 않은 암흑기가 이어졌고, 다시 한번 구단의 주인이 바뀌었으며,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려던 현대 유니콘스가 '임시연고지'라는 애매한 명목으로 수원에 자리를 잡으며 수원 야구팬을 난감한 처지로 몰기도 한 끝에 해체돼 아예 주인없는 집으로 몇 해를 비워두게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원야구장 스탠드 곳곳에는 아직 식지 않은 추억의 온기가 남아있다. 그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웃게 될 날이 올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