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드시 필요하지만
왜 아름드리나무 베어 쓰는
종이에 소비를 위한
정보 알려주는 데만 써야하나
아무리 정보만능 시대라지만…
지구 종말을 다룬 영화가 꽤 많이 만들어졌다. 외부 생물의 침략이나 천재지변에 의한 것으로 설정한 영화가 대다수요 인간 스스로 욕망을 못 다스려 자멸한다고 설정한 영화는 별로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구 종말이 온다면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구 종말의 날이면 대도시의 거리엔 무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내 종이를 만들었고, 그 종이가 지구의 산소를 줄어들게 해 종말의 위기가 온다는 것이 설득력있는 가정이라고 생각된다.
거리에 나가면 무가지가 차고 넘친다. 아침에 지하철역 입구에서 주워갖는 신문도 무가지고 대형서점에 쌓여 있는 출판정보지도 다 무료다. 이처럼 아무 부담 없이 주워서 읽고는 금방 버리는 잡지가 있다. 미국과 서구에서 20년 전부터 '멤버스 매거진'(Member's Magazine), '스트리트 페이퍼'(Street Paper), '프리진'(Freezine) 등의 이름으로 시작된 이들 잡지는 광고를 유치한 비용으로 제작해 문화ㆍ쇼핑ㆍ패션 등 다양한 분야의 생활정보를 담아 독자들에게 무료로 배포한다. 당연히 특정한 연령층이나 계층 등 한정된 독자만을 대상으로 한다. 서점 같은 유통경로를 거치지 않아서 언더그라운드 잡지라고도 한다.
우리 사회를 어떤 이는 소비사회라고 하고 어떤 이는 후기산업사회라고 한다. 현대를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도 하고 정보전쟁의 시대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영상매체의 시대라고 하고 어떤 이는 광고의 시대라고 한다. 다 맞는 말이다. 거리에 나가면 발에 차이는 것이 광고지요 지역정보지다. 조간신문을 펼쳐들면 광고전단지가 우수수 떨어진다. 어여쁜 여성을 찍은 사진이 발길에 차이기도 한다. 비닐을 뒤집어쓰고 있거나 햇볕에 빛바래고 있는 지역정보지 안에는 페이지마다 광고가 빽빽이 들어 있다. 이것을 사시라고, 혹은 그것을 팔라고 광고는 우리에게 애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역정보지의 변형이랄 수 있는 스트리트 페이퍼가 압구정동과 합정동, 명동과 신촌 일대의 카페를 중심으로 널리 뿌려지고 있다. 카페뿐만 아니라 공연장ㆍ패션매장ㆍ미용실ㆍ레스토랑 등 수백 곳의 공공장소에 뿌려지고, 이런 소책자를 만든 곳에서는 배포처를 수시로 바꾸기도 한다. 영화, 공연예술, 게임, 팝과 클래식, 대중가요, 레포츠와 이벤트에 대한 정보, 차밍 숙녀가 되는 데 필요한 정보…. 정보의 홍수요 광고의 산사태다.
대학가에 가면 당연히 그 대학의 대학신문이 있지만 신문을 안 보듯이 대학신문도 학생들이 보지 않는다. 오히려 상품정보, 공연정보, 어학연수나 해외여행, 단기 아르바이트 등을 소개하는 각종 정보지에 학생들의 손길이 간다.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은 교양과 인문학이 아니라 오락과 취업이다. 대학 문화를 선도하던 곳이 학교 앞 서점이었던 것은 대학생들의 주머니가 향토장학금으로 얄팍했던 태곳적 이야기다. 오늘날 대학교정 안에는 패스트푸드점과 카페들이 들어와 있다. 곳곳에 자판기가 있고, 음료수 소비량은 정말 엄청나다. 오늘날 대학이 과연 학문의 전당인가? 일부 부유층의 과소비를 비난할 수 없을 만큼 자본주의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다양한 색조의 불을 지피고 있는 스트리트 페이퍼들. 서가에 꽂히지 않고 거리에서 굴러다니다 청소부의 손에 거두어져 숨을 거두는 슬픈 운명의 스트리트 페이퍼들은 우리에게 사고할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생각의 깊이'는 철학과 학생들이나 찾을 일이고, 각종 정보를 빨리 아는 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요 경쟁력이다. 현대사회에서 정보와 광고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둘의 힘이 강대해져 가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지된 운명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아름드리나무들을 베어서 쓰는 종이를 이렇게 '사서 쓰자'와 '가서 보자'는, 소비를 위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만 써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정보만능의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좋은 의미의 에고이즘과 경쟁심을 묵살한 공산주의의 종말은 갈비뼈가 앙상한 북한의 어린아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가속도로 자본주의가 진행된다면 그 마지막 모습은 지구 전체가 지난 어느 시절의 난지도로 변한, 거대한 쓰레기의 산맥일 것이다. 카페 같은 곳에 쌓여 있는 스트리트 페이퍼를 볼 때마다 나는 왜 슬퍼지는 것일까. 수출 신장만큼 중요한 것이 내수시장의 증대라고 기업체들은 주장한다. 아, 소비가 미덕이고 절약은 악덕일까. 오늘도 거리에서 만나는 스트리트 페이퍼들은 말한다. 빨리 가서 보세요. 빨리 사서 써보세요. 여행을 떠나세요. 돈이라는 것은 쓰라고 만든 것입니다. 근검절약? 누구한테 좋은 일이게요.
/이승하 중앙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