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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 행사 있었던 12월 31일
친구들과 쉽게 헤어지지 못했고
자정 5분전에 또 자리를 옮겼다
한잔 한잔 취해가는데 갑자기
독일인 사장이 "해피 뉴이어!"
영어로 외쳐 새해인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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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소설가
2016년 12월 31일은 작가들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송년인데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느껴졌는데 날이 춥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무언가를 보낸다는 것은 잃어버린다는 것, 여기에 없게 된다는 것, 부재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 그렇다면 온도는 더 낮아야 하지 않을까. 학교 다닐 때 배운 신기한 개념 중 하나는 '기화열(氣化熱)'이라는 것이었다. 물이 기체가 되어 본래 상태에서 벗어날 때 열을 가져간다는 원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별의 정리와 닮아 있으니까.

행사가 끝나고 송년이니까 각자 계획이 있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같이 있고 싶어했고 카페로 가서 차를 마셨다. 무언가 아주 단 것,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농도 짙은 달콤함이 필요해서 휘핑크림과 시럽을 잔뜩 넣은 초콜릿음료를 주문했고 그 사이 누구는 연애를 시작했고 누구는 내년에 결혼을 하고 누구는 곧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고 말리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아직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해 정기적인 심리 상담을 계속해야 하는 친구와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공통된 마음은 2016년이 가는 것이 아쉽지 않다는 것인데 한 친구가 "매번 우리는 그런 것 같지 않아"라고 물었다. 정말 한해의 마지막마다 잘가, 다시는 오지마, 하는 마음이기는 했다. 하지만 내심 아쉬움과 슬픔이 없는 건 아니니까 사실 그 단호한 결별의 선언이란 연인에게 거짓으로 이별을 고하는 사람의 과장된 연기 같은 것은 아닐까.

자정을 두 시간 앞두고도 우리는 쉽게 헤어지지 못했다. 한국어를 거의 못하지만 신기하게도 한국말을 다 알아듣는 독일인 사장이 있는 좀 먼곳의 맥줏집에 가서 안주로 감자를 먹고 싶다고 친구가 말했고 나는 평소에 그 친구가 다른 이들을 배려하느라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제안이 반가웠다. 새해가 되면 친구가 더 자주 감자를 먹자고, 나는 그 감자가 너무 맛있다고 말해줬으면 싶었다. 택시를 타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걷기에는 멀고 차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를 송년의 밤에 실어날라 줄 택시는 없었다. 송년의 밤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열심히 달려야 하는 밤, 그렇게 해서 또 내일로 넘어가야 하는 밤이니까. 걷다 보니 우리는 제각기 흩어져 있었지만 너무 멀어질 것 같으면 뒤돌아보면서 "여기야, 여기로 가야 해"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겨우 도착했는데 만석이라서 대기를 걸어놓고 고양이를 테마로 하는 다른 펍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하고 "고양이는 어디 있어요"라고 묻자 사장은 "고양이는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이 펍의 고양이들은 길고양이들이라고. 특별한 고양이를 기르고 있지 않아 거리의 모든 고양이가 특별해지는 고양이 펍이라니 나는 마음이 뭉근해졌다.

그렇게 한잔 한잔 취해갔지만 친구가 감자를 먹고 싶어한다는 것은 절대 잊지 않았고 자정 5분 전에 또 자리를 옮겼다. 앉느라 어수선해져 아쉽게도 카운트다운은 못했고 독일인 사장이 갑자기 "해피 뉴이어!"라고 독일어도 한국어도 아닌 영어로 인사해서 새해인 것을 알았다. 감자를 두 접시나 먹고 나와 이제 정말 집으로 가야지, 하고 걷는데 친구들 사이에서 기타를 자동으로 조율해주는 기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쟁이 붙었다. 답답해진 친구가 "정말 있다니까" 하면서 메고 있던 기타를 길 한가운데에서 꺼내 보여주었는데 그런 신기한 기계가 정말 있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기타가 나오니까 연주를 안 해볼 수 없었고 우리는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새해였으니까, 새해의 그 새벽에 우리가 함께 있었으니까.

택시를 타고 가면서 오늘 뭘 어떻게 보냈고 어떻게 특별했었지, 열심히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다만 포근한 밤이라 춥지 않다는 생각은 분명히 들었다. 그렇게 해서 다행인 밤이었다.

/김금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