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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1933~)

이미 우리에게는
태어난 곳이 고향이 아니다
자란 곳이 고향이 아니다

거기가 고향이 아니다
거기가 고향이 아니다
산과 돌 온통 달려오는
우리 역사가 고향이다

그리하여 바람 찬 날
몸조차 휘날리는 날
우리가 쓰러질 곳
그곳이 고향이다
내 고향이다

고은(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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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흔히 자신이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고 하지만, 현재 살아가는 곳을 고향이라고 하기도 한다. 예컨대 태어난 곳을 '몸의 고향'이라고 한다면 현실의 고향은 '땅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땅의 고향은 몸의 고향과 달리 어머니에게 나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그곳에 자신을 맡기는 곳. 매 순간 우리는 미래를 향해 무방비로 노출된 불안한 현실의 품 안에서 먹고, 입고, 잠자는 오늘을 있게 하는 곳이 진정한 고향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바람 찬 날 몸조차 휘날리는 날 우리가 쓰러질 곳 그곳이 고향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어머니라는 '모성적 본향'에서 와서 현실이라는 '사회적 요람'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어디든지 될 수 있는 이 땅의 '내 고향'에서 자신을 묻고 행복을 물으리라.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