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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인터넷에 떠도는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잘못 인용
최근 생긴 용정 생가 표지석 문구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誤記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시비의
그릇된 번역 등 바로잡아야 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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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가 치러지고 있고 또 준비 중인 모양이다. 특이하게도 윤동주는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북간도와 평양과 서울과 도쿄와 교토에서 공부했고, 후쿠오카에서 죽음을 맞고, 다시 북간도 용정으로 돌아와 묻힌 일종의 원환적(圓環的) 이력을 가진 시인이다. 불과 27년 1개월 17일의 짧았던 삶이 커다란 동아시아적 스케일을 가진 이채로운 것이었다. 이러한 윤동주를 역사 속에 선명하게 각인한 것은 정지용, 강처중, 정병욱 등 선후배 동료와 윤일주, 윤혜원 등 형제분들이었다. 이분들의 정성으로 윤동주는 세상에 알려졌고, 그 후로 그는 그야말로 자발적 기억에 의해 기려진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의 순결했던 시와 삶과 죽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 그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생산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고대해본다. 하지만 그 전에 윤동주와 관련하여 고쳐야 할 점이 몇 있다.

먼저 그의 시로 잘못 알려진 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 대표적 경우는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작품이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냐고 물을 것입니다."라는 인생론적 사색의 시편인데, 오래 전부터 인터넷상에서 윤동주 작품으로 잘못 인용되고 있다. 또한 윤동주 시편으로 통용되는 '편지'라는 작품 역시 그의 것이 아니다.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라는 말랑말랑한 센티멘털리즘 시편을 윤동주는 쓰지 않았다. 이렇게 잘못 인용되는 이유는 그의 시가 맑고 서정적이기만 하다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윤동주는 그냥 단순한 서정시인이 아니라 훼손된 세계와 긴장감 있는 대결을 택했던 시인이다. 인터넷에 의존하지 말고 윤동주 시집을 직접 읽고 기억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최근 용정 생가에 생긴 표지석을 지적해야 한다. 거기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동북공정 이후 중국에서는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규정하고 있고, 중국 포털 사이트에서도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윤동주는 자신이 일본인이나 중국인과는 전혀 다른 조선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시편을 명백하게 한글로만 썼다. 거기에 새삼 '한국시인'이라고 표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한글로만 쓰면 된다. 왜냐하면 윤동주는 한글로만 시를 썼고, 그렇게 표기만 해도 그는 분명한 '한국시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외교부나 문체부의 노력이 강력하게 요청된다.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 윤동주가 중국 국적으로 표기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교정에 놓인 시비의 번역 문제이다. 거기에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서시가 육필시와 일역시로 함께 새겨져 있다. 그런데 제6행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라고 번역해놓았다. 우리말로 하면 "사는 동안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죽어가다'와 '살아있다'는 어쩌면 동의어일 수도 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하루하루 죽어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이 존재의 앞모습이라면, '죽어가는' 것은 존재의 뒷모습일 터이다. 더구나 이 시편이 씌어질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때였기 때문에 윤동주로서는 더더욱 역사 속에 스러져가는 이들에 대한 특유의 연민을 노래했을 것이다. 그만큼 윤동주가 사랑하고자 한 존재자들의 뒷모습으로서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번역에서 되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윤동주 작품으로의 오인(誤認), 용정 생가 표지석의 오기(誤記), 도시샤대학 시비의 오역(誤譯)을 바로잡는 것은 윤동주 기념의 열기 못지 않게 중요한 우리의 참다운 메모리얼 인프라가 될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