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학
박노학 흉상. /원일중 제공

태평양 전쟁때 日에 동원돼 '탄광부역'
박노학씨등 '조선인 귀환' 호소 앞장서
구소련·日 무책임 韓 외면에 해결안돼


안산시를 관통하는 지하철 4호선 안산선을 타고 상록수역을 지나면 한대앞역이 있습니다. 역에서 나와 사동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넓은 광장이 나오고 광장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고향마을'이라는 아파트 단지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 아파트 단지는 평범한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지난 2000년 구 소련의 영토였던 사할린에서 영구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이 사는 곳입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두 분의 흉상이 있는데 바로 박노학, 박해동이라는 분입니다.

그 중에 '박노학' 이라는 분은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의 전시동원이 극심하던 때에 사할린에 들어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할린의 나이부치(현 브이코프)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인만 귀국하고 사할린에 있던 조선인들은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사할린에 와있던 일본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소련과 지속적인 협상을 벌여 1958년 자국민 귀환정책의 일환으로 사할린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본토로 데려갔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인과 결혼한 외국인도 포함돼 있어 박노학씨도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사할린에 남겨진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 있음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당시 일본에 들어온 사할린 한인들 중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 씨 등이 주축이 돼 '가라후토(사할린의 일본식 표기) 억류 귀환자동맹'(후에 '가라후토 귀환 재일한국인회'로 명칭 변경)을 도쿄에서 결성했습니다.

회장을 맡았던 박노학씨는 1958년 1월 사할린에서 귀국할 때 배 안에서 귀환하는 동포들과 함께 남아 있는 동포들의 귀환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해 도착하자마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이 일을 시작으로 해서 일본 적십자사, 외무성, 법무성 등을 찾아다니면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호소했고, 한국 정부와 대한적십자사에도 귀환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12월에는 국제적십자사에 탄원서를 보내 일본과 한국 정부의 무책임함, 소련 정부의 가혹함 등을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1967년 박노학 회장은 사할린 한인들이 친지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받아 한국에 보내는 활동을 하면서 이를 근거로 1천744세대, 6천924명의 귀환희망자 명단을 완성해 한국, 일본, 소련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이 명부는 이후 한국 정부의 귀환협상에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은 잘 해결되지 않았고,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훗날 사할린 동포들이 일부 영주 귀국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구 소련의 소극적 대응과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 같은 동포이면서도 외면한 한국 정부로 인해 사할린 동포들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가 패이게 됐습니다.

그나마 박노학 회장 같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많은 사할린 동포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버이 날을 맞이해 사할린에 두고 온 자식들을 생각하며 고향마을에서 외롭게 사시는 사할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따뜻한 손길이 필요함을 생각해 봅니다.

/신대광 원일중 수석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