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쪽 NLL 인근 해상
북한 고속정과의 사투
부상자 치료하던 박 병장, 바로 옆에 있던 서 중사
눈 앞에서 자식 같은 병사들을 잃었다
분쟁의 바다서 살아남은 그는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

꼭 15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쪽 NLL 인근 해상에서 우리 해군과 북한군의 전투가 있었다. '제2연평해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NLL이 분쟁의 바다임을 보여주는 상징 같은 사건이다.
서해의 평화를 얘기하려면 먼저 분쟁의 역사부터 들춰볼 필요가 있다. 제2연평해전 발생 15년이 지난 지금 그 분쟁의 바다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의 얘기를 들어봤다.
27일 오전 11시께 인천해역방어사령부에서 15년 전 제2연평해전에 참전했다가 살아남은 이해영(52) 원사를 만났다. 이 원사는 "정말 치열하게 싸운 전투가 잊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쉬움이 있다"며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아직 6월이 되면 전사자들 생각에 마음이 찡하다"고 말했다.
2002년 6월 29일 오전 5시께 인천 옹진군 연평도 해상 경비작전을 수행하는 우리 해군2함대 소속 고속정 252편대(참수리 357·358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NLL 경비와 우리 꽃게잡이 어선의 보호를 위해 출항했다. 편대는 고속정 2척으로 구성된 해군의 최소 단위 전투부대인데 1척 당 28명이 탑승한다.
357호 갑판장이었던 이 원사는 며칠 전부터 우리 NLL을 왔다 갔다 하며 눈치를 보는 북한 경비정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전날에도 차단 작전을 통해 북한 경비정을 퇴각시킨 터였다. 이날도 북한 고속정 '등산곶 684호'가 우리 NLL을 침범해 차단작전에 나섰는데 평소와 달리 북한 고속정이 퇴각하지 않고 계속 내려왔다.
갑판에서 현장 지휘 임무를 맡은 이 원사는 좌현 M60 기관총 사수에게 "준비해라...준비해라...준비해라..."라고 사격 준비 지시를 내렸다. 오전 10시 25분께 '준비해라'라는 말을 10번 정도 말할 때쯤 북한 경비정 쪽에서 굉음이 났다. 이 원사는 그 순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와 얼굴은 파편이 박혀 피투성이였고, 주변에서는 다친 병사들이 '갑판장님 피하세요'라고 외치고 있었어요. 소총으로 대응사격을 하고 358호가 북한 고속정을 향해 계속 공격을 퍼붓고 있었죠."
의무병이자 전화수 역할을 했던 故박동혁 병장이 몸을 사리지 않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파편에 맞았다. 이 원사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 병장은 전투 이후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숨졌다. 이 원사 바로 옆에 있던 故서후원 중사도 쓰러졌다.
이 원사는 이날 북한의 공격은 우발이 아닌 명백히 계획 아래 이뤄진 의도적 공격으로 기억한다. 북한 경비정은 첫 공격에서 故윤영하 소령(357호 정장)이 있는 함교를 명중시켰다. 지휘관을 잃은 357호는 집중 공격을 당했고 결국 6명의 사망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비정은 지휘관이 위치하는 곳이 외부에 노출돼 있어 북한은 이를 노리고 조준 사격을 한 것이죠. 며칠 전부터 NLL을 넘나들며 눈치를 보던 북한 고속정은 우리 군의 대응을 염탐한 것이에요. 우리가 차단작전만 할 뿐 선제 경고사격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고속정에서 정장이 '아버지'라면 갑판장은 '어머니' 역할을 했다. 이 원사는 배에서 매 끼니를 챙겨 먹는 단원들을 위해 부침개도 부쳐주고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이며 김치며 아낌없이 내놓았다. 라면에 밥과 여러 부식을 넣고 함께 끓인 '라밥'이 주특기 메뉴였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357호의 최고령자였던 그는 갑판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책임지며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후임 부사관들과 병사들을 챙겼다. 말 그대로 '한 배를 탄 식구'들이 눈앞에서 전사하는 것을 목격한 이 원사는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
부상을 입고 살아남은 그는 2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군 복무 중이다. 이 원사는 제2연평해전 전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 원사가 못내 섭섭한 점은 당시 전투에서 숨진 故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사망자 6명이 '전사자'가 아닌 '순직자'의 예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2002년에는 '전사'와 '순직'이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라 공무 중 사망이라는 기준에 따라 순직자 예우만 받았다.
2004년 관련 규정이 개정돼 군인연금법에 전사자 예우 조항이 생겼음에도 소급적용은 하지 못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를 순직자에서 전사자로 격상하는 내용의 법안(제2연평해전 전투수행자에 대한 명예선양 및 보상에 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논의됐지만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
"윤 소령을 비롯한 전사자들이 전사자 예우를 받지 못해 서운한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국민들의 마음에서 잊히는 것이 더 걱정이에요. 2002년 6월 29일은 월드컵 3·4위전이 열린 날이기도 했고 당시 언론에서 크게 주목하지도 않았죠."
북한 선제공격으로 인한 지휘관 전사, 그리고 고속정 침몰. 승전이냐 패전이냐 논란이 있지만, 이 원사는 제2연평해전이 '승전'이라고 말한다.
"제2연평해전이 패전이라고 하는 시각도 있지만 전투에 참가한 입장에서는 절대 패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선제 공격을 당하기는 했어도 같은 편대 358호의 보복 응징으로 적군에 큰 피해를 입혔고, 357호가 전투에서 침몰한 것이 아니라 예인을 하던 중 침몰했기 때문이죠."
2019년 전역이 예정된 이 원사는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청수지원정 정장으로 복무하고 있다. 해상에 머물러 있는 바지선과 함정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정이다. 그는 전역 후 안보교육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제2연평해전을 통해 겪은 남북대치의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어서다.
"2년 전 영화 '연평해전'이 상영되면서 국민들이 서서히 관심을 가져주시기 시작했어요. 사실 나라는 군인들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함께 지키는 거예요. 저마다 나름대로 안보의식을 갖고 국방에 대해 단합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국민으로서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죠."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이해영 원사는?
▲ 1964년 8월 25일 출생
▲ 1983년 12월 8일 해군 부사관 입대
▲ 1984년 5월 26일 임관
▲ 현계급 진급일 2008년 12월 1일
-주요보직
▲ 1984년 APD 전남함
▲ 1991년 DDH 전주함
▲ 2001년 FFK 전남함
▲ 2002년 PKM 357정(제2 연평해전)
▲ 2007년 PCC 성남함
▲ 2017년 라-112호정 정장
-수상경력
▲ 1999년 참모총장 표창
▲ 2002년 대통령 전투유공 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