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계층 지원 '문화누리카드'
수급권 '권리'로 간주되는 만큼
바우처 형태가 아니라
현금처럼 제한없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정석원교수
정석원 사회복지사·서정대학교 겸임교수
지인 선배는 통신사 부장으로 명퇴한 지 한 삼 년 정도가 되었다. 늦은 아침을 혼자 먹고 동네 산을 오르는 게 주된 소일거리다. 당연히 가족 내 부딪힘도 잦아졌다. 처음 한 일 년은 심한 우울감에 정신과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아내의 핀잔을 바깥 탓으로 돌리는 데는 성공했다. 하루는 책도 보고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일찍 집을 나섰다. 지 선배가 사는 곳은 신도시로 서울 광화문까지는 전철로 한 시간가량이다. 늘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연가(年暇)를 즐기고 싶었다. 서점에서 일이다. 적당히 붐비는 사람 속에 묻혀 한참을 기웃거리는데 말쑥한 노인이 점잖게 말을 걸어왔다. 책을 사실 거냐고, 책을 산다면 책값을 자신의 카드로 계산하고 대신 현금으로 돌려줄 수 있겠냐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잘 몰라 머뭇거리자 카드를 내보이며 "여기에 십만 원도 넘게 돈이 있다"라고 했다. 지 선배는 급한 약속이 있다며 짧게 거절하고 돌아섰다. 왠지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사실 노인이 내민 것은 문화누리카드다. 문화소외층의 삶의 질 향상과 계층 간 문화 격차 완화를 지원하는 '통합문화이용권'으로 소위 문화 복지사업이다. 지난달 문화체육관광부는 2019년 문화누리카드 예산규모를 951억원으로 책정하고 개인별 지원금을 연간 7만원에서 8만원으로 늘린다는 사업 예산안을 발표했다. 2017년부터 해마다 1만원씩 증가한 셈이다. 이처럼 매년 증가하는 예산에도 불구하고 낮은 사업성과는 고민이다. 선행연구에 의하면 물리적·정보적 접근성이 통합문화이용권 사업에 대한 만족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다. 2017년 연천군 문화누리카드 발급률은 70.2%이다. 경기지역 평균 발급률 92.8% 보다 낮은 수준이다. 이처럼 비도심 지역 노년층이나 장애인 등은 불충분한 정보와 열악한 이동수단 때문에 참여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용률(경기도 평균 62%)도 저조할 수밖에 없다. 이용 가능한 가맹점수 또한 시·군 간의 차이가 심각한 상태로 문화예술 인프라 격차를 해소하는 정책이 절실하다는 주장이다.

서점에서 만난 노인의 경우 사용자가 실구매 없이 문화누리카드로 결제하고 이를 현금으로 돌려받았다면 엄연히 부정사용자로 위법이다. 관행으로 알고 매달 용돈처럼 현금으로 받아 쓴 국회 특수활동비에 비하면 뭐가 그리 큰 문제인가 싶다. 도덕적 잣대의 무게가 다를 수 없지만 국민감정은 그렇지 않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2014년 부정수급 통합 콜센터가 잡아낸 100억원의 부정수급 사례 중 97억8천만 원은 제공기관의 비리"라며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지적한 바 있다.

흔히 문화는 '삶을 담는 그릇'이라 한다. 문화 예술뿐만 아니라 여가를 위한 일상 활동까지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홀로 사는 노인이 자식보다 잦은 걸음으로 찾아오는 독거노인 관리사에게 믹스커피라도 한 잔 대접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행복한 일상인가. 받아만 먹는 세금 충(蟲)이 아니라 사람이 본디 가져야 할 정(情)을 나누는데 쓰임이 더 요긴한 사람도 많다. 현대에 와서 수급권이 '권리'로 간주되는 만큼 현물이 아닌 현금 지급을 원칙으로 한다. 이런 이유로 문화 소외계층에 지원하는 문화누리카드는 바우처 형태가 아니라 현금처럼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 윤형근이 예순을 넘어 작업노트에 적은 글이다. 그의 언급처럼 글도 그림에도 잔소리가 없다. 다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 것을, 서점에서 만난 노인에게 '카드깡'을 해드렸어야 했나?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하다. 요즈음 같은 날, 청진동 해장국이라도 한 그릇 자시고 싶지 않겠는가.

/정석원 사회복지사·서정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