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률 도의원 사진
안광률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시흥1)
갯골은 갯고랑이라고도 하며 갯벌 사이로 난 물고랑을 가리킨다.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들고나는 갯골에는 농게 등 갯것들과 다양한 종류의 철새가 이웃 삼아 살아간다. 밀물 때가 되면 저 멀리 서해바다로부터 갯골을 통해 바닷물이 넘칠 듯 가득 차지만 썰물 때가 되면 펄을 내보이며 갯고랑을 보이는데 가을이면 주변의 황금빛 갈대와 붉은빛의 칠면초, 회색빛 갯골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도 펼쳐낸다.

시흥갯골은 1930년대 염전으로 개발되어 사용되었다가 1996년 염전사업을 마치면서 자연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는데 예전 갯벌에 난 수로를 이용하여 소래포구의 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을 생산했던 곳이라 하여 갯골이라 불렀다.

어릴 적 포동의 염전터는 필자에게 친구들과의 놀이터요 용돈벌이의 추억의 이야기를 간직하게 한다. 포동은 1936년에 일본인이 58만원을 들여 새우개마을과 신촌마을 앞에 200만㎡ 염전을 조성했고, 한때 경기 서부 일원에 소금을 공급했던 곳이다. 염전은 바닥이 지금의 인조잔디보다 푹신해서 친구들과 축구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어 즐겁게 뛰놀았던 곳이다. 단, 염전관리인에게 들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예전의 염전소금은 진흙땅 또는 갯벌에서 채취해서 거무튀튀한 색이 들어있기에 시각적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찾기에는 부족함이 있었기에 많은 염전들이 바닥을 타일로 교체했고 이를 기회 삼아 용돈벌이 전선에 나서기도 했다. 타일작업을 한 염전소금은 햇빛도 잘 받고 소금농도가 높아지는 효과가 탁월했으며 정해진 타일을 깔고 나면 당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듯이 삼양라면 세봉지가 자그마한 내 손에 열매처럼 들려졌다. 또한 낚시꾼들에게 갯지렁이를 분유통에 담아 한 통에 500원에 팔고, 좀 더 많은 라면을 확보하게 위해서 물레방아를 돌리면 라면 세 봉지들이 한 세트가 원 플러스 원으로 두 세트가 주어졌다.

이렇듯 당시 시흥 갯골은 매년 6월부터 9월까지 남자들은 염전에서 돈을 만지고 아낙네들은 집안일과 밭일을 도맡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일자리로 소금돈이 몰리고 상가와 주점이 번창했으며 또한 소금돈으로 배를 구입해 고기잡이까지 하니 지금은 이야기로만 나누지만 그 당시의 시흥 갯골은 경제부흥의 황금시대였다. 이후 1996년 7월 31일 천일염 수입 자유화 조치에 따라 소금 생산이 중단되면서 문을 닫게 됐다. 145만평의 염전에서 활발하게 채취하던 소금 생산을 그만두게 되면서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전락하는 등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 기억 속에서 잊힌지 10여 년이 흐르자 다양한 염생식물과 각종 어류, 양서류 등이 서식하고 이를 먹이 삼아 여러 종류의 조류와 포유류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갯벌을 붉게 물들이며 칠면조처럼 색이 변한다 해서 이름 붙여진 '칠면초', 마디마다 양쪽으로 퉁퉁한 가지가 갈라지는 '퉁퉁마디', 조롱조롱 별 모양의 열매를 달고 있는 '해홍나물' 등 다양한 염생식물과 산조풀·모새달·부들·갈대 등 습지식물, 방게·농게·칠게 등 갑각류, 조개와 고동의 연체동물, 저어새·노랑부리저어새·검은머리물떼세·황조롱이·노랑부리백왜가리·갈매기·쇠백로 등 조류가 바람이 지나가는 길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 내륙 깊숙이 수로를 끼고 뱀이 기어가는 모양의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사행성 내만갯골을 자랑하는 곳, 시흥갯골은 독특한 자연군락에 옛 염전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변모해갔다.

지금은 천혜의 자연조건과 소래염전터가 어우러진 '시흥갯골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밀대를 밀어 소금꽃도 거둬보고, 겨울 왕국 아닌 하얀 소금 왕국의 소금성도 만들어보고 소금꽃길 조성도 체험하면서 관람객들에게 염전에 대한 이야기꽃을 전하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배우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계획하라'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내 고장 시흥갯골에서 삶을 배웠고 현재의 직분에 충실하게 임하며 희망의 미래를 만들어감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해 본다.

/안광률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시흥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