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곡·양성면민 시위대 2천여명 '횃불 합세'
日경찰 주재소 불태우고 일본인 상점 공격
똘똘 뭉친 순국선열들의 헌신 잊지 말아야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민족지도자 33인과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은 우리 민족 전체가 일어난 비폭력 자주독립운동으로 일제 식민지에서 발발한 최초 그리고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다. 탑골공원을 기점으로 수원의 화홍문, 강화, 인천, 고양, 양평 등 지방으로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널리 퍼져나갔다. 100년 전 3월부터 4월까지 경기도지역 만세운동에는 282회 16만여 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여했다. 당시 평안북도 의주군, 황해도 수안군, 경기도 안성군을 전국 3대 항쟁지로 거론하는데 이 중 경기도 최대의 항일운동인 안성 4·1만세항쟁은 '안성 3·1운동기념관'에서 그 날의 현장과 역사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4월 1일 안성 원곡면에는 천여 명의 동네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후 양성면으로 향했고 만세 고개(舊 성은 고개)를 넘어 양성면민이 뜻을 모아 합세하자 시위대는 2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일본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상점을 공격하고 다음날은 원곡면사무소를 공격하면서 4월 1일과 2일 이틀간 일본인이 없는 감격의 해방을 잠시나마 누려본다.
4월 3일, 원곡과 양성면에 일본 군대와 경찰이 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쳐들어왔고 여기서 일제는 해산한 시위대를 잡기 위해 비열한 간계를 사용한다. 경찰서장의 연설을 들으면 잘못을 용서해준다고 약속하며 4월 19일 지금의 원곡초등학교 뒷산으로 남자들을 모이게 했다. 남편이자 자식의 무탈을 걱정하는 가족의 권유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모이자 언제 약속을 했냐는 듯 일본 헌병대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하고, 저항하거나 도망가는 사람에게는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후 일제는 마을을 돌며 농민들을 체포하거나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았으며 여기서 24명의 안성군민이 목숨을 잃었고 127명의 농민들이 투옥되어 12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여기에 더해 시위 중 파괴된 건물과 일제 상점에 대한 배상 등 악랄한 경제적 보복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시위에 2천여 명이 참여한 것은 양성면과 원곡면 마을이 1천200여호에 불과했다는 점을 볼 때 가구당 2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인의 자주독립의지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 사람이 열 걸음을 가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한 걸음을 가는 것이 의미 있다'는 말처럼 시골 골짜기 민초들뿐만 아니라 학생, 지식인, 나이의 어리고 많고를 떠나 민족 혼으로 똘똘 뭉친 수많은 순국선열의 헌신 속에 일제강점기 36년의 캄캄한 터널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비로소 광복의 밝은 빛을 맞이할 수 있었다. 1919년 4월 1일은 안성군민들이 거국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날이다. 4·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는 오늘, 100년 전 자력으로 이틀간의 해방을 쟁취한 그날의 기쁨과 고난을 다 함께 느껴 보자! 그리고 민족 화합과 통일의 새 시대를 만들기 위해 지혜를 모아 보자!
/양운석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안성1)